휘트필드와 웨슬리의 부흥운동 이화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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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필드와 웨슬리의 부흥운동

이화영 목사

18세기에 영국에는 두 명의 위대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죠지 휘
트필드요 다른 한 사람은 죤 웨슬리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연배로서 옥스퍼
드대학에서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홀리클럽에서 경건훈련을 하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먼저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휘트필드입니
다. 휘트필드는 첫 번 설교를 할 때부터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시작부
터 대단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휘트필드가 초청 받아 설교하는 교회마다 자리가 모자라서 사
람들이 되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기존교회 목
회자들의 시기와 질투도 점점 더 증가했습니다. 그러자 휘트필드는 평소부터 
생각해 오던 야외설교를 어느 탄광촌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때만 해도 웨슬리
는 엄숙함이 결여된 야외설교는 마귀의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
니다. 

처음에 몇 백 명이 모이던 휘트필드의 야외집회가 불과 몇 번만에 수
만 명이 
모이는 거대한 집회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휘트필드는 주로 예수님처럼 자그
마한 산자락에 올라가서 산밑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휘트
필드는 자기 혼자서 설교를 감당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죤 웨슬리에게 편지를 보내서 와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휘트필드는 죤 웨슬
리가 와서 도와주리라는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죤 웨슬리가 왔
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나눠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쯤 그렇게 하다가 휘트필드는 그 곳을 웨슬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다른 곳
으로 복음을 전하러 떠났습니다. 

송삼용 목사가 지은 휘트필드의 전기를 보면 휘트필드도 한 때 자발적인 휘트
필드 지지조식을 운영한 바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휘트필드는 그 조직이 
국교회와의 분리를 가져온다는 이유로 조직에서 손을 떼고 맙니다. 그 후로 
그는 오직 연합만을 강조하며 복음을 전해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떠
남으로 자연스럽게 그의 부흥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만일 휘트필드
가 자
신의 조직을 계속 유지발전 시켰더라면 오늘날 영국에는 칼빈주의 혹은 
청교도 사상으로 무장한 건전한 개신교회가 존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
고 그 단체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을 것입니
다. 

휘트필드의 뒤를 이어서 죤 웨슬리가 설교하자 사람들이 휘트필드의 설교 때
처럼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죤 웨슬리는 휘트필드와 다르게 부흥운동
을 했습니다. 그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 “세계를 복음화 하자”라는 큰 비전
을 제시하고 성도들을 묶어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국교회와 분리를 각오
하면서까지 조직적으로 부흥운동을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웨슬리가 만든 조
직은 점점 더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해서 웨슬리부흥운동을 힘있게 도았습니
다. 결국 그 조직은 국교회와 분리가 되어서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조직
은 웨슬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 유지, 확장되며 부흥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리
고 지금까지 웨슬리의 부흥운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영국국교회의 변질과 타락을 볼 때 웨슬리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
합니다. 만일 휘트필드가 끝까지 자신의 
추종자들을 조직화해서 그 조직을 후
세에 물려주었다면 영국의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건전해 졌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또한 세계 복음화에도 큰 기여를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영국 부흥운동의 역사는 연합이나 설교도 중요하지만 비전제시와 조직
도 매우 중요한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