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망애 해석학
성주진 교수/ 합신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담 풍’ 해라”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대화에
서 발음에 문제가 있을 경우 의사소통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도 정황
을 참작해서 듣는 사람은 나중의 ‘바담 풍’이 사실은 ‘바람 풍’이라는 것을
추론하고 대화를 진행시켜 나갑니다. 반면에 ‘바담 풍’은 ‘바담 풍’일 뿐이라
고 기계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의미있는 대화가 불가능해 집니다.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의사소통의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
습니다. ‘바담 풍’이라고 잘못 말한 경우 ‘바람 풍’이라고 이해되기를 기대하
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바람 풍’이라고 정확하게 발음해도 듣는 이
가 안 듣거나, 잘못 듣거나, 못 들었다고 우기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바
담 풍’이라고 말해 놓고도 ‘바람 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더욱 많습니
다.
그리스도인 사이의 대화도 같은 문제로 시달릴 수 있습
니다. 아무리 정확한
용어를 구사하고 논리적으로 말을 해도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말의 의미가 제
대로 전달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부족한 표현이라도 말하고자 하
는 의도를 잘 파악해서 깊은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화
가 정확한 말과 문법 이상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특히 그리스도인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인 기초
는 무엇일까요? 또한 그리스도인이 듣고 말함에 있어 주관적으로 요청되는 태
도는 무엇일까요? 필자는 전자를 성경으로, 후자를 믿음, 소망, 사랑으로 보
고자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의미있는 대화를 위해서는 언약의 정신에 기초
한 ‘신망애 해석학’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먼저 ‘믿음의 해석학’이 요청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사
람과 세상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오고가는 말을 의미있게 만
드는 더 큰 그림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창조의 걸작품, 그리고 하나
님의 자녀라는 그림을 통하여 사람과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눈앞에 있는 형제에게로 확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선한
의도를 믿지 못하는 ‘의심의 해석학’은 그의 말을 거짓으로 듣게 합니다. 그
가 하는 말이 옳으면 옳을수록 그만큼 가증스럽게 보이고, 좋으면 좋을수록
그만큼 위선적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형제에
대한 지혜로운 분별에 앞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소망의 해석학’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종
말론적 긴장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의 구원이 아직은 완성된 것이 아니기
에, 지금의 나의 해석과 관점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자각을 가지고 겸손
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영원의 관점은 또한 불신앙적 조급함이나 ‘절망의 해석학’을 넘어서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져다줍니다. 터무니없는 오해를 풀지 못해 잠 못
이루는 밤에도 더 이상 안달하지 않고 참음으로 온전한 이해를 기다릴 수 있
습니다. 사실 사람은 자신의 복잡미묘한 마음의 작용과 동기를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마음의 심연을 그대로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사랑의 해석학’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제대로 이해
되지 않습니다. 이해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없을 때 의도는 왜곡되고 의미는
전달되지 못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의 말을 곡해하게 되기 때문
에 의미있는 의사소통이 어려워집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원하는 반응
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해석학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증오의 해석학’을 용해합니
다. ‘때문에’를 넘어선, ‘불구하고’에 기초한 사랑의 해석학은 어떤 대화에
도 있을 수밖에 없는 미비점을 보완하여 상호불신과 미움을 치유할 수 있습니
다.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과업입니다. 그리고
신망애 해석학은 과업의 성취를 위한 기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