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진 칼럼> 기적의 이인칭(二人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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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진 칼럼>

기적의 이인칭(二人稱)

성주진 교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 하오니, 어찌 사
람이라 하겠습니까?’ 길동의 이 애끓는 대사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립니다.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대감’이라고 불러야만 되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
서 길동은 비인간화된 자신의 비참함을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와
의 바른 관계는 인간존재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피차 바른 호
칭으로 불려질 때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이인칭’ 하면 보통 ‘너, 당신’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틴 부버의 생각을 빌어서 한 인격이 독특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다른 인격
을 부르는 모든 호칭을 이인칭이라고 정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인칭적인 관계
를 향한 염원은 보편적 현상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
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
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서두입니다. 인간관계를 노래하는 시로 소박하
게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남에게 바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던 존재에서 의미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 시는 계속
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
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이번에는 나도 다른 사람에게 바른 이름으로 불림을 받는, 의미있는 존재
가 되고 싶어합니다.
이 시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렇게 나는 남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또 남도 나에게 의미있는 존재
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입니다.

의미있는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름 부르기’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 어떤 모임에서 뜻밖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적이 있
습니다. 나도 모르게 격식을 차린 말투로 인사를 하
자, 그가 대뜸 말했습니
다. ‘야, 너 보러 왔어, 임마.’ 허물없이 부른 그 ‘임마’라는 호칭은 둘 사이
의 담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이전의 친밀감을 회복시키는 마력을 발휘하였습
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이인칭의 기적을 가장 깊고 독특
한 의미에서 이미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
게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하시고,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를 힘입어 하나님을 ‘아바(아빠)’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이 호칭은 하나님
과의 본질적인 관계를 이름지어 줄뿐만 아니라,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지속
시켜 주는 기적의 이인칭입니다. 

이 호칭은 상처투성이의 영혼에게 ‘사람은 너를 버려도 나는 결코 너를 버
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불러 일으킵니다. 버림받은 자신을 ‘너’라고 불러 주
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상처받은 우리의 고집센 자아는 그냥 무
너져 내립니다. 우리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감격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이 땅에서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만으로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불완전하거나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랑은 형제의 사랑을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의 이름을 알고 살아갑니다. 친숙한 이름도 있지
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름도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 틈에서 관계의 상실
을 내심 두려워하며 교회를 출입하는 고독한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나와 너’의 의미있는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불
러 주신 그 귀한 이름 그대로 형제와 자매를 불러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먼
저 다가가고, 먼저 인사하고, 먼저 ‘이름’을 불러 기도하는 이인칭적인 교제
는 주님의 은혜로 사랑의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