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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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균 칼럼>
성현교회 이야기

성현교회는 수원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입니다. 저는 이 교회의 목회자 부
부를 오래 전부터 잘 압니다. 십수년 전, 제가 성남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하
고 있을 때 만난 부부입니다. 남편은 어느 공장에 전기기사로 다니고, 아내
는 방문판매를 하는 열심 있는 부부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받은 남편이 어느날 신학교를 가겠다며 직장을 그만 두었고, 부인
은 왜 그 고생을 하느냐며 반대하였습니다. 그때 이 부부는 여러번 저를
찾아왔고, 저는 이미 말릴 수 없는 상황임을 확인하고 부부를 격려하여 신
학공부를 하는데 여러 조언을 하였습니다.그후, 이 부부는 제가 섬기던 교
회에 사찰로 들어와 참으로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때, 이 부부가 가난한 부목사인 나와 우리 가정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지
금 생각해도 눈물이 겹도록 잘 했습니다. 혹시 소뼈다귀라도 사다 삶으면
반드시 절반을 나누어서 그 비탈길을 걸어 우리 집에 가지고 왔습니다. 한
번은 저를 붙잡고 어딘가 같이 가자고 재촉
을 하기에 무슨 일인가 하여 물
었더니 제 양복을 맞추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려운 처지에 무슨 양
복이냐며 펄쩍 뛰었으나, 곗돈을 탔다며 억지로 저를 끌고 가서 양복을 맞
추어 주었습니다. 결혼 후 처음 입어보는 맞춤 양복이었습니다. 저는 그 양
복을 유학 갈 때도 가지고 가서 수시로 입다가, 오면서 어느 흑인 형제에
게 건네주고 왔습니다.
그 부부는 어렵사리 신학공부를 마치고, 안수를 받고, 무서우리 만큼 열심
히 기도하면서 수원 변두리 화성군이라는 곳의 어느 마을 밭 가운데에 성
현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교회를 개척한 것을 보고 저는 유학을 떠났습니
다. 그후 그분들은 삼성전관 근처 지하실을 얻어 교회를 옮겼습니다. 그 어
려운 개척교회를 하면서도 한번도 걸르지 않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매월 5만원씩을 보내주고, 수시로 국제전화를 걸어 격려해 주고, 가
끔씩은 제 아내 약을 해주라며 특별후원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저 지난 해에는 제가 그 교회에서 4일동안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여름이면
물이 새는 그 지하 예배실에 의외로 헌신된 청년 교인들이 여럿 있는 것을
보고 저는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와 어렵게 공장에
다니며 살고 있는 그 젊은이들이 얼마나 교회에 헌신적이고 목사님 부부에
게 잘 하는지, “자기들이 목회자에게 그렇게 잘하더니, 자기가 목회자 되
어 그렇게 잘하는 교인들을 만나는구나!”
그런데 지난 해 늦가을에, 교회를 수원으로 옮겼다며 두 분이 수원의 학교
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름이면 물을 품느라 힘이 들고, 퀴퀴한 냄새가 나
서 괴로웠는데, 마침 그 동네로 큰 길이 나는 바람에 동네가 깨어지다시피
하여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옮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새
로 옮긴 교회당에 가보았습니다. 가구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 2층 건물의
130평이나 되는 널찍한 홀이었습니다. 1억3천을 주고 얻었다는 말을 들으
면서 교인 30여명이 그 돈 마련하느라 얼마나 고생했을지 마음이 아팠습니
다. 그러나 그 아픈 마음는 사모님의 다음 말씀을 들으며 부끄러움으로 변
하고 말았습니다. “별로 큰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성가대 지휘하는 청년
회장이 4500만원을 대출받아다 헌금하고, 또 다른 청년 하나가 1500만원을
대출받아 헌금하고…. 청년들이 이렇게 좋은 데로 
교회가 왔다고 얼마나
흥분을 하고 좋아하는지 몰라요. 청년들이 단체로 자전거를 샀어요. 교회가
멀어졌으니까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면서요.”
넓은 데로 이사를 와 아직 의자를 다 채워넣지 못하여 한쪽이 휑하니 보기
에 좋지 않았습니다. 물으니 15만원짜리 의자가 12개가 모자란다 하였습니
다. 교회를 나오면서 길건너의 은행에 뛰어들어가 마이너스 통장에서 돈
30만원을 인출하여 의자 두 개 값을 헌금하고 돌아오며 저는 여러 가지 생
각을 하였습니다. 교회 이전하는 일을 막 시작하던 제게 왠지 용기가 생겼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