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슬로 쓴 편지
내 이름 아시죠!
“나무들 이름 알아가며 주의 경이로움도 알게 돼”
이영란 사모_좋은소식교회
어느 날, 늘 다니는 호숫가 작은 숲을 지나다가 한 나무 아래 발길이 머물렀
다. ‘자작나무’라고 써있는 나무명패 때문이었다. “아! 이 나무가 자작나
무구나, 사모님이 좋아하신다던…”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기에 좋아하실
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무척 반가웠다.
새록새록 다가선 나무들 이름
수년 전에 섬기던 교회 교역자 부부들이 중국을 방문했는데 다녀온 후 소감
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사모님 한 분이 말씀하시던 중 “내가 좋아하는
자작나무가 백두산 가는 길에…”라는 대목에서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
았다. 평소에 드러나지 않았던 사모님의 존재가 그 순간 크게 느껴졌기 때문
이다. 전에도 가끔 나무이름을 말해주곤 하셨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많은
이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으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작나무를 반갑게 만나던 그 날
우연히 ‘하얀 자작나무 위로 하얀 비둘기
가 날아가는 것이 아름답다’는 글을 읽게 되었다. 다음 날 다시 그 나무를
찾았다. 놀랍게도 그 나무 기둥이 조금씩 벗겨졌지만 은빛 흰색이었다.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나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힘들 때마다 늘 새로움과 희망
을 주었던 거목이 바로 느티나무라는 것도 그 즈음에 알았다. 나무에게 미안
했다. 자작나무, 산사나무, 신갈나무, 순수꽃다리, 자귀나무, 이팝나무, 살
구나무, 계수나무, 뽕나무, 화살나무, 명자나무, 홍단풍, 비롱나무, 산수
유, 층층나무, 팽나무, 메타쉐콰이어… 하루하루 나무들이 내게 다가왔다.
잎이 비슷해서 구분하기가 어려워 그 특징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조금씩 이름을 알게 되던 때에 내가 보기에 산사나무 같은데 ‘신갈나무’라
고 명패가 붙어있어서 “참 이상하다” 하며 고민 아닌 고민을 했다. 어느
날 보니 나무 명패가 없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에 ‘산사나무’라고
걸려있었다. 참 기뻤다.
산사나무는 나를 깊은 계곡근처 근처로 데려다 주곤 했다. 나지막하니 넓고
소담스러운 그늘을 주면서도 검붉은 고풍스러운 열매
들로 인하여 단아함이
돋보였다. 올 여름에도 날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하루는 선생님과 중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 대여섯 명이 내가 좋아하게 된 산
사나무 아래 모여 있었다. 호기심에 그 나무 밑 아이들 틈에 끼어 들었다.
나무이름을 묻는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별 대답을 다한다. 심지어 앵두나무라
고까지 했다. 선생님은 산사나무라고 말해주면서 ‘메이플’이라는 외국이름
과 나무에 얽힌 내력들을 말씀해주셨다.
집에 와서 검색을 해보니 놀랍게도 청교도들이 탔던 메이플라워호가 바로
이 나무이름이었다. 5월에 눈부신 흰 꽃이 바로 메이플라워(mayflower)이
다. 예수님이 쓰신 가시면류관이 이 나무라고도 믿기에 벼락도 악마도 막아
준다고 신성시하기도 한다고 한다. 며칠 후에 나 또한 교회 청년자매와 아
침 산책을 하면서 나무 이름들을 신나서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산사나무 아
래도 데리고 갔다.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나무 이름 하나하나 알아 가는 것이 참 기쁘고 감사했다. 가을이 되니 산사
나무 아래는 붉은 열매들과 잎들이 떨어져 예쁘게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키
가 제일 큰 가중나무 잎이 제일 먼저 떨어졌
다. 햇빛을 잘 받은 느티나무 잎
들이 흔들릴 때는 황금처럼 눈부셨다. 온 호숫가를 물들이는 계수나무, 산수
유 열매들은 가을의 보석처럼 빛났다. 순수꽃다리 잎은 정말 가슴을 시리게
할 정도로 곱게 물든다. 그 잎을 하나 들고 만져보았다. 내 마음이 들여다보
이는 듯 했다.
이제는 낙엽을 주우면서 이름을 부를 수 있다. 나뭇잎 하나 하나에도 이름
이 있다. 비슷한 것 같아도 색도 모양도 조금씩 다르고 떨어지는 시기도 다
르다.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잎들이 수북히 쌓여 어우러진 곳에 햇빛이 비치
면 마치 문틈으로 천국의 황금빛을 엿본 듯 황홀하다.
가끔 나무 밑에서 나무 위를 쳐다보고 기둥을 만져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름
을 불러본다. 나무도 나에게 대답을 하는 것일까. 반갑기도 하고 참 뿌듯했
다. 그러다가 늘 가깝게 만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정말 내가 그 이
름을 알고 있는 것인지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작나무로 인연하여 나무들과 친해지면서 사모님 생각을 더 하게 되었다.
사실 나의 미숙한 사모의 길에 항상 그분의 모습이 큰 그림으로 인도해주고
있었다. 그분이 전도하거나 일을 하는 모습도 못
보았고 크게 소리내어 기도
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목사님을 세우려는 모습을 본 적은 더더욱 없었는데
도 그림자처럼 개척교회 사모의 삶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래! 그분에게 사랑을 느꼈었지. 나뿐만 아니었어!” 마치 자작나무를 좋
아하시듯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나무들 이름이 하늘의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그 이름을 붙여주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해주었다(시 140:4). 별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시는 그
분은 정말 어떤 사랑이실까!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이 가슴에 부어진다.
‘아브라함’이라 ‘사라’라 부르신 하나님, 시몬을 ‘베드로’라 부르신
주님, 그분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도라 부
르시고 그날에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주신다고 하셨다.
“내 이름 아시죠!” 긴장과 답답함과 탄식 중에라도 나는 내 이름을 아시
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으로 나아간다. 온 땅에 가득한 주님의 경이로
운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나아간다.
이름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요… 사람
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시 8: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