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아신스의 교훈_민 진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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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길

히아신스의 교훈

민 진 사모_늘푸른교회

당차게 시작하려 했던 새해가 얼마나 매서운 얼굴로 나를 몰아세우는지! 정
신을 차리지 못하고 한 달을 지내고 있다. 주님의 손잡고 싸목싸목 걸어 보
겠다던 나의 의지가 여지없이 메치기 당한 기분이다.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 
앞에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고, 어딘가로 숨고 싶다. 

새해 맞던 의지 벌써 시들해

나의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모습들이야 주위에서 일어난다고 할 수 있지만 너
무 민감하게 반응하고,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내 인격의 소
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이 피해를 보는 것 같아서 늘 
미안한데 남편이 제일 괴로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참아
보려 하고 잘 넘겨보려 하는데 끝내는 이기지 못하고 질 때도 많다. 
남편은 내가 화를 낼 때마다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그걸 못 참느냐
고!” 한다. 그러면서 “왜 잘 있다가 금요일 토요일 뒤집느냐고” 화를 

다. 주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금요일이 중요하고, 토요일이 그야말로 중요
한데 이렇게 안에서 시끄러우니 말씀 준비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일까? 살아오면서 
내 자신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때때로, 변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속상하고 주
님께 송구할 때가 많다. 말씀 앞에 나를 쳐서 복종시켜야 됨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정작 그렇지 못할 때는 울적해진다. 그러다 보면 이것저것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이 더 확대되어 다가와서 괴로워진다. 나의 부족한 것들, 
사람들과의 관계, 교회의 아픈 부분들이 나를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든다. 

얼마 전 마트에 갔다가 플라스틱 작은 화분을 한 개 사왔다. 고운 흙에 심겨
지지도 않고, 자갈돌에 비뚤게 심겨진, 양파처럼 생긴 알뿌리에서 이파리와 
꽃대를 드러내고 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을 온힘을 다해서 외치고 있는 듯하
다. 아직 피지 않은 화분을 사는 즐거움은 꽃이 피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데 묘미가 있다. 
화분 한 개에 3,500원을 주고 샀는데 아이들에게 “이름을 맞히면, 용치”하
자 잘 모른다고 한다. 
그러다가 큰딸이 “히아신스”라고 한다. “그래 맞
다” 하자 “찍었는데”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평소에 화초에 관심 없는 
것 같아서 섭섭하기도 하다. 전에도 분명 히아신스를 샀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녀석이 낮에는 햇빛을 쏘여주고, 가끔 물주고, 모르는 듯 지내기
를 1주일.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던 화분이 드디어 달라지고 있다. 꽃필 
부분이 조금 더 적색이 되고, 맨 위 꽃잎이 약간 벌어져 있는 것이다. 그걸 
보는 내 마음에 작은 희망이 꿈틀댄다. 다시금 잘해 보자는 속삭임이 들려오
는 듯하다. 
방학이라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정서적으로 마르고, 힘겨워하는 나에게 
‘푸’하고 향기를 내뿜는 듯하다. 화초도 보이지 않게 자라며 주인을 기쁘
게 하는데, 나는 왜 이리도 변화가 더딘지. 주님이 참 답답하시겠다는 생각
이 든다. 때마다 말씀하시고, 간섭하시는데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말씀은 아
득히 잊어버리고 내 감정, 내 기분이 먼저이니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하고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나는 세상의 법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도 잊어먹고, 주어진 현실
에 갑갑해하고, 답답해한다. 내가 원하는 결과
물이 없다고 실망하고 낙심한
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주제넘은 생각인지! 우리의 모든 결과물은 주님
의 것이고, 주님이 받으셔야 하는 것인데 단맛을 내가 먼저 미리, 빨리 보
지 못한다고 속상해 하는 것은 아닐까? 

단맛 먼저 보려는 욕심일 뿐

몇 푼 주고 사온 작은 화초도 날마다 자라가며 기쁨을 주는데, 주님 몸값으
로 산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큰 것이 아니고 
자기 자리에서 주님보고 피어나는 것이리라. 내 모습 이대로 초라함을 인정
하고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 그리고 이 자리를 지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