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_조병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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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의 목회편지(102)

딤전 5:21

선입견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요주의 인물’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
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혹시나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
음으로 그런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이
미 말썽을 일으킨 적이 있는 사람은 요주의 인물이 된다. 
실제로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물의를 빚음으로써 더불어 사는 사람들
에게 폐를 끼치는 요주의 인물이 적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불행하게도 요주의 인물이라는 딱지를 받으면 사람들의 선입
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생동안 편견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사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가정과 같은 아주 작은 사회에
서부터 모든 사회에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가장 잔인한 방식 중
에 하나이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범죄한 사람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책망하여 나머지 사

n람들이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책망의 과정에
서 아주 조심해야 할 사항을 한 가지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
한 일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 자신도 매우 엄숙한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
니.” 이 구절은 천사들 가운데 선택받은 천사들과 버림받은 천사들이 있다
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개혁신학에서 오랫동안 주목을 받아온 
구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명
령이 매우 엄중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뿐 아니
라 천사들까지도 동원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책망의 과정에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이 책망의 과정에서 그처럼 조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 것은 도대
체 무엇인가? 그것은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망의 과정에
서 반드시 배제해야 할 것은 선입견이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한 문장에
서 비슷한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이 사실을 강조했다. 

편견으로
부터 자유해야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라.” 여기
에 사용된 편견(프로크리마)이라는 말이나 편벽(프로크리시스)이라는 말은 
본래 같은 말에서 조금 다르게 파생된 것으로서 둘 다 미리 판단한다는 뜻
을 지니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두 단어는 선입견을 의미한다. 이것은 진
상을 알아보기도 전에 상대방에 대하여 이미 어떤 부정적인 생각을 품는 것
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책망의 과정에서 선입견을 가지는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이것은 잘못된 책망이 되어 사실과 다르게 책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뿐 아니라 선입견을 가지면 때때로 불필요한 책
망을 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책망은 사람에게 엄
청난 상처를 입히고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좌절에 빠뜨리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오류와 실수는 역사책에서도 수없이 발견되며 또한 우리의 실생
활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반복된다. 때로는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오류와 실수는 다반사로 벌어진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

서 이미 오랫동안 충분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동일한 오류와 실
수를 저지른다. 그만큼 선입견을 배제한 책망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책
망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책망에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은 더욱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목회지도에서 많은 말을 했지만 선
입견을 버린 책망을 말할 때만큼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 적은 없다(단지 유
사한 예가 딤전 6:13에 한번 더 나온다). 이것은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얼마
나 어려운 일인지 잘 보여준다. 만일 선입견을 버린 사람이 있다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인생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
을 것이다. 
특히 목회자가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할 수 있다면 그는 온전한 목회자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을, 무식한 사람
과 유식한 사람을,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을 공평히 대할 수 있는 목회자는 
그 자체로 이미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