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수의 목회편지(59)-믿음의 담력 (딤전 3:13b)

0
8

믿음의 담력 (딤전 3:13b)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내가 아는 친구가운데는 무대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어느 날 여름성경학교 강습회에 참석하였는
데, 무대체질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동료교
사 한 명과 함께 개회예배에서 이중창으로 특별찬송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청중 앞에 나서자마자 앞이 새하얗게 되면서 가사도 곡조도 증
발하여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피아노 반주만 요란스럽게 예
배당 안에 울려 퍼지고 말았다. 

그러던 그 친구가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사가 된 후에 누가 
보아도 감복할 정도로 교회와 성도를 충성스럽게 섬겼다. 가끔 그의 설교를 
듣노라면 메시지가 얼마나 강하고 힘이 있는지 옛날 사람들 앞에서 쩔쩔매던 
모습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충성에서 용기가 나온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이다. 

충성에서 용기가 나온다는 것
은 꼭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
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
에게나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래서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이 그리스도 예
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은 교회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한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귀중한 말이다. 믿음의 담대함은 
직분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주님의 모든 직분자에게 주어지는 위대한 선물이
다. 브리스길라가 그랬고, 스데반이 그랬으며, 베드로가 그랬다. 그런데 충
성이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사도 바
울 자신일 것이다. 

틀림없이 사도 바울은 믿음의 담력에 관하여 말하면서 자신의 삶을 생각했
을 것이다. 그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놀랍도록 담대하
였고 (행 13:46; 14:3; 18:26; 19:8),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말
할 때도 참으로 담대하였다 (살전 2:2 – 개역성경에는 “담대하였다”가 번역
되지 않았음). 사도 바울은 심지어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
이 담대하게 복음을 진술하였다 (행 26:26). 그는 죄인
의 몸으로 로마에 체
류하는 동안에도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 (행 28:31). 

그는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면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는 것을 제목으로 내놓았다 (엡 6:19). 사도 바울은 실제로 자
신이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이유가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말하는 것에 있다고 믿었다 (엡 6:20). 

믿음의 담력은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만드는 데 총집중하기 때문에 사
도 바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초월하게 만든다. “나
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
게 하려 하나니” (빌 1:20). 자기의 목이라도 내놓은 브리스길라가 그런 사
람이었고 (롬 16:3), 돌에 맞아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스데반이 그
런 사람이었으며 (행 7:58), 예수의 이름 때문에 채찍질 당하는 것도 마다
하지 않았던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다 (행 5:40). 믿음의 담력을 지닌 사
람은 그리스
도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발견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와 교회를 위하여 직분을 맡는 것을 손해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
가! 지금 많은 신자들이 봉사에 대한 손해감정에 사로잡혀 교회 일에 깊이 
개입할수록 골치가 아플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로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롯하여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경험했던 위대한 선
물, 교회의 직분을 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의 담력을 소개하고 있지만, 우리는 어떻게든지 이것을 듣지 않으려고 마음
의 귀를 막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초대교회로부터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 시간적으로 그럴 뿐 만 아니라 질적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