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 교수의 현대신학 해설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3)
지난 호에 이어 과정 신학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과정
철학에서는 ‘창조성'(creativity)과 하나님을 동일화하지 않는다. 둘을 동일
화하면 어떤 실체(substance)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즉 불변의 존
재를 인정하고 다원론이 아니라 단일론(monism)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서 화이트헤드는 ‘창조성’을 ‘추상성'(abstraction)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즉 ‘현실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화이트헤드처럼 하나님을 ‘창조성’의 한 예(example)로 볼 경우에는 그 ‘창조
성’의 근원에 관한 문제가 대두된다. 그래서 어떤 과정 철학자들은 ‘창조
성’과 하나님을 동일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창조성의 역할을 그리스
도에게 부여할 경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단지
기독교 교리를 흉내내기 위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무엇
으로
보고,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창조성’의 역할을 부여한다는 것은 과정철학의
관점에서 보아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콥은 예수를 어떻게 보는가? 즉 그리스도는 ‘창조적 변혁’ 혹은 ‘최
초 겨냥’으로 정의한다 하더라도 유대인으로 오신 나사렛 예수는 어떻게 보는
가? 콥에 따르면 예수는 현실체(actual entities)들로 구성된 인간으로 그
의 ‘존재 구성'(structure of existence)이 특별났었다고 주장한다. 예수에게
는 ‘최초겨냥'(initial aim)이, 즉 로고스가 특별하게 충만히 부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의 말이나 행적을 통하여 지금도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의 ‘객관적 효과성'(objective efficacy)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를 하나님이 아닌 단순한 인간으로 본다면 무슨 근거로 또
한 어떤 기준에 의해 ‘최초 겨냥’의 임재가 예수에게 불균형적으로 특별히 임
했다는 것인가? 과정철학에 의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에 ‘최초 겨냥’이 부여되
고 객관적으로 불
변하는(objectively immortal) 현실체들이 다른 현실체들을
위한 자료로 주어지고 자체 과정에서 “합생”(concrescence)을 이룬다고 한
다. 만약 예수도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존재라면, 예수에게 있어서 다른 자료
(data)와 합생의 역할은 무엇인가? 즉 어떻게 ‘최초 겨냥’이 다른 현실체들과
는 달리 예수에게는 충만히 임했다는 것인가? 사실 현실체들은 자창적이며 결
과를 자기가 결정한다고 과정 철학에서는 주장하는데, 왜 예수에게서는
그 ‘최초 겨냥’이 그의 존재를 좌우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
런 예를 인정한다면 과정의 ‘정규성'(regularity)은 없어지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콥은 예수가 ‘최초 겨냥’ 혹은 로고스로 항상 충만해 있지는 않았
다고 한다. 즉 그가 잠을 잘 때나 어린아이였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다. 특별히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번민할 때는 충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예수같이 로고스가 충만했던 사
람이 어딘가 분명히 있었겠지만, 예수의 경우 콥 자신에게 충분하다는 것이
다. 그렇다면 이런 예수에 대한 비일관
성과 로고스가 충만하다는 사실과는 어
떻게 조화가 되는가? 콥은 예수의 혁명적이고 새로움을 불러일으킨 것이 로고
스 혹은 ‘최초 겨냥’의 특별한 역할이라 한다. 그렇다면 인간 역사에 혁명적
이고 새로운 것을 불러일으킨 많은 사람들이 알려졌는데, 왜 그 사람들에
게 ‘최초 겨냥’이 충만히 임했다고 보지 않는가? 왜 그들도 그리스도라 불리
울 수 없는가? 콥 자신에게는 예수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은 학자로서 무책임
한 말인 것이다. 그는 단지 자신은 과정의 결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믿고
예수가 아니라 과정 실재에 충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콥은 또한 미래적 철학자들(Moltmann, Bloch, Teihard de Chardin 등)과 유심
론적 철학자들의 개념들을 의존하며 그리스도를 또 다른 이미지(image), 즉
희망(hope)으로 정의한다. 콥은 현 실재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 예를 들어,
종교 다원주의, 여성주의, 생태 위기, 범죄, 인종 차별, 가난, 전쟁, 등의 문
제들을 그리스도 개념으로 해결 해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해결이 장차 시간
이 흐르면서(과정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런 낙관적 생각은 ‘창조적
변혁’ 개념의 자연적 연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상 자체가 영원한 것이
고 세상은 하나님의 ‘결과적 성품'(consequent nature)이라는 주장, 즉 하나
님은 세상과 모든 것을 같이 하는 존재라는 주장을 근거로 그리스도가 세상
의 현실 참여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콥의 이런 생
각에 문제가 많다. 먼저 과정철학의 과정이란 어떤 미래적이라기 보다는 현재
의 진행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자료(data)가 주어지고, 자체의 창조적 과정
이 합생(concrescence)으로 끝난다고 주장한다. 즉 과정이라는 것은 미래로
이어지지만 그 과정은 미래에 대한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희망의
철학자들은 미래 혹은 약속(promise)에 대한 어떤 존재론적 의미와 근거를 제
시하려 하지만 과정철학은 단순히 어떤 비시간적 가능성만을 이야기 할 뿐이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희망으로 정의하는 것은 과정철학의 성격과 맞지 않
는다.
결론적으로 과정 신학은 기독교 교리에 과정 철학의 용어와 개념들로 옷을 입
힌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작업에 많은 모순들이 발견된다. 무엇보다도 과
정신학자들이 성경의 가
르침을 왜곡하고 자기들의 과정 개념으로 억지로 재해
석하는 것은 학자적 양심에 위배되는 것이요, 그들이 주장하는 종교 다원주의
적 관용을 기독교에는 베풀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