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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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원 교수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이번 호로 시작하여 여러 호를 거쳐 바르트 신학을 다루고자 한다.
그 이유는 바르트 신학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기 때문이요, 무
엇보다도 보수 신학에 끼친 부정적 영향 때문이다. 그의 신학의 까다로움
과 애매함으로 인해 많은 복음 주의자들은 그를 자기 진영으로 생각해
왔다. 아마도 슐라이어막허와 리츨로 시작되었던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가 정통적 보수 신학에서 너무도 벗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바르트 신학을 복음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그는 그의
대작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비롯한 자신의 저서에서 전
통적으로 쓰였던 신학적 용어를 똑같이 쓰고 여러 개혁주의 보수 신학자
들을 인용도 하고 성경적 개념들을 똑같이 도입하기 때문에 그를 복음주
의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신정통주의(neo-
orthodoxy)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신학은 결코 보
수-정통적 신학과 맥을 같
이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독소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르트 신학은 비성격적 신학이며 칸트, 헤겔,
키에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 등을 기초로 나름대로 발전시킨 것
이다. 물론 당시 바르트가 처했던 상황을 감안하면 어떤 동정적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인본주의적이었던 당시 자유 신학에 대항
하여 기독교적 신앙 회복, 성경을 근거로 한 설교의 가능성과 필요성, 초
월적 하나님의 위치,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 등을 확립하고자 했던 그의
학문적 업적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바른 신학은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 줘야 하는 것도 아
니요, 학문적 성취를 위한 것도 아니다. 바른 신학이란 하나님의 계시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서 출
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경 자체에서 시작했다기 보다는 초월
적 기독교를 회복하고픈 마음에 철학적 조명 아래에서 나름대로의 ‘계시’
개념을 가지고 시작했던 것이다.
바르트의 출현을 흔히들 ‘신학자들이 놀고 있던 놀이터에 폭탄을 터

n트렸다’고 표현한다. 그만큼 바르트는 당시 구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에게
큰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명예 박사 학위만 있었던 바르트는 원래 한 작
은 마을의 목회자였다. 이 당시 그는 교인들에게 설교함에 있어서 자유주
의 신학이 전혀 쓸모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그는 성경을 깊이 연구
하기 시작했고 자유주의의 철학적 내용이 아니라 성경안에 있는 초월적
말씀의 개념을 가지고서야 교인들을 위한 적절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
때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자유주의 비판이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는 복음이란 인간들과 상관없이 하
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을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나
이성을 가지고 발전시킬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바로 구
자유주의 신학이 이런 식으로 복음을 인간 이성과 문화의 전유물로 추락
시켰다고 바르트는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 자유주의 신학을 ‘아래로부
터 위로’의 신학이라 한다면 바르트의 신학은 ‘위로부터 아래로’의 신학이
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 복음, 영원, 구원 등은 바로 하나님의

시를 통하여 오는 것이며 인간은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다.
바르트의 신학을 흔히들 ‘말씀의 신학,’ ‘변증법적 신학’ 혹은 ‘위기의
신학’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철학의 특징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전적 초월성 사이의 무한
한 차이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생각을 합리적으로 종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역설적 진리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유한한 인간에게
오로지 신앙의 도약(leap)을 통해서만 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시간과 영원 사이 혹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무
한한 질적 차이'(qualitatively infinite difference)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여러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중, 1930년에 본
(Bonn) 대학에서 봉직하면서 작은 신학적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유
주의에 대한 거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지난 10년 동안 천명
하였던 ‘아니오’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를
더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들 생각하듯 그의 신학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보수신학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신학의 변증법적(dialectical) 특징이 더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처음에 조직신학에 관해 저술하기를 꺼려했다. 그 이유는
어떤 인간적 사상 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신학적이고 그러
므로 전적으로 성경적인 신학을 창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인간이
가지는 신앙의 주관성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과학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예
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자기 계시를 은혜와 믿음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안에 나타
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능하다
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러한 신념들을 가지고
미완성으로 끝났지만『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이라는 조직 신
학서를 쓰기 시작했고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권까지 썼다. 그러면
다음 호부터 왜 그의 신정통 신학이 정통이 아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