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용서와 용서의 한계_황대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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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용서와 용서의 한계

< 황대우 목사, 고신대 교수 >

“신자라면 용서를 비는 일과 용서하는 일에 익숙해야”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다. 그것도 무한한 용서의 종교다. 즉 기독교는 용서를 비는 자에게 용서의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용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용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만큼이나 무한하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 용서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 용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품고도 남을 만큼 무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용서에도 한계는 있다. 즉 용서 받을 자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한지, 즉 용서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거나, 그가 그것을 깨닫긴 해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용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용서받지 못한 자로 남게 된다.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용서는 무한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 자, 죄인인줄 알면서도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구원의 길은 닫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한계다.

물론 이와 다르게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는 무엇으로도 제한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인지 몰라도, 죄인인지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결국에는 구원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신적 사랑과 용서의 무한성 덕분에 예외 없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가르치지만, 어디에도 그로 인해 만인이 자동으로 구원의 혜택을 입게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구원 받는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택자”들 뿐이다. 이 택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리 무한한 것이어도 스스로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이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용서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한한 기독교적 용서의 한계다.

인간 상호간의 용서도 이런 원리가 적용된다고 본다. 고의적인 잘못을 잘못으로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용서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으므로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혹 우리가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생각나면 먼저 그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한 다음 다시 기도할 것을 요구하신다.

기독교는 무한한 용서의 종교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용서를 비는 일과 용서하는 일에 익숙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는 용서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타인에게 대한 잘못을 발견할 경우, 반드시 먼저 그에게 찾아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용서해줄 때까지 용서를 빌어야 한다.

반면에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잘못은 용서하지 않는 자의 몫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할 의무도 있지만 용서를 구하는 자를 용서해야 할 의무도 있기 때문이다.

용서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용서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용서를 비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역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볼 수 없다.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종교다. 화해는 용서로부터,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난다. 용서와 화해의 희망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도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바로 이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임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