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와 쥐
< 허태성 목사, 강변교회 >
“성공만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거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6.25 전쟁 후의 베이비 부머(Baby boomer) 세대의 일원으로 태어난 필자에게 어린 시절 기억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60년대 중반부터이다. 그때 우리나라의 국민소득(GNP)은 79달러였으니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당시 우리 집에는 농토가 조금 있어서 굶지는 않았지만 육류나 간식 같은 것은 거의 먹을 수가 없었다. 그때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서 먹었던 것이 두더지였다. 두더지는 땅속을 이동할 때 땅 표면에 표시를 내고 움직였기 때문에 잡기가 쉬웠다.
두더지를 잡아 죽인 후 깨끗한 물로 씻어서 작은 뚝배기에 넣고 한 동안 끓이면 뽀얀 사골국물 같은 것이 우러나온다. 그것을 먼저 마시고 두더지 고기를 뜯어서 소금에 찍어 먹었다. 처음에는 징그러웠지만 곧 그 맛에 익숙하게 되어 두더지를 찾아다니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보다 더 큰 두더지를 발견했다. 그 놈은 힘들여 잡을 필요도 없이 이미 죽어있었다.
그것을 들고 의기양양하여 어머니께 가지고 가서 끓여달라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그것은 두더지가 아니라 쥐약을 먹고 죽은 쥐였던 것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 후로는 두더지를 먹지 않았다. 겉모습이 비슷한 두더지와 쥐를 구별하는 지혜가 없었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이다.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것을 분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요즈음 더 깊이 깨닫고 있다.
종교와 신앙은 비슷하다. 물론 기독교를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의 범주에 넣어서 설명할 수도 있다. 기독교만이 참 종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의 요지는 인간 중심의 종교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종교인과 신앙인은 그가 열심이 있나 없나를 떠나서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열심만 있으면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크기만 하다면 다 좋은 것이고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강변교회에 연합구역예배의 강사로 오신 분이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은 다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다만 자존감이 낮고 사회성이 발달이 안 되어 그렇습니다”라고 말하자 모두가 웃었다. 그런데 정말 신앙이 좋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적인 종교인이 되어버렸기에 예수님을 힘들게 했던 바리새인처럼 행하는 것임을 간과하기가 쉽다. 기도에 있어서도 분별력을 잃기가 쉽다. 누군가가 영적인 은혜를 받아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여러 시간 동안 기도했다면 그것을 무작정 좋은 기도라고 생각하거나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무슨 내용으로 기도했느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 예고에 대해 베드로가 항변하며 예수님을 막아설 때 그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꾸짖으셨다(마 16:22-23).
누군들 스승이나 부모가 죽는다는데 ‘그렇게 하시지요!’ 라고 말하겠는가? 누군들 자녀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데 ‘알았다. 그렇게 하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라면 반응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결정은 내가 한다.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피해 달아나지 말고 오히려 고난을 끌어안아라.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셨다(마 16:24). 그런데 우리는 내가 결정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얼마나 긴 시간을 기도하는가? 그리고 그런 스스로를 열심 있는 신앙인이라고 자평을 한다. 단지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서 열심히 기도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적인 성공과 믿음 안에서의 성숙조차 잘 구별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성공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거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러한 분별없는 열심과 값싼 복음에 침묵을 해왔다. 아니, 교묘히 그런 것을 진리로 가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전해왔다. 분별하는 것을 싫어하는 청중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고상한 목회라고 생각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서는 날에 뭐라고 말씀하실까를 생각해 보면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두더지는 두더지이고, 쥐는 쥐다’라고 말하며 살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제위들도 필자처럼 두더지와 쥐를 구별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치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