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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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에서

허정무(시인)

늘 나를 흥분하게 만들던 백지의 공간. 오늘은 휴! 하고 긴 한숨이 먼저 자리
를 잡는다. 이것쯤이야 하지만 기분여하에 따라 한도 끝도 없는 평지 같고 때
론 신이 나면 메모장으로 보였으니 수많은 집착과 수 없는 패배, 가늠되지 않
는 승리를 오늘까지 여기에 그리고, 만들고, 쌓고, 지우며 많은 반복을 해왔
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무사히 있었음을 반가워할 수밖에. 모든 것이 오늘
이 아닌 다음에야 과거였고 미래가 되는 것. 비켜갈 수 없는 나의 길이기도 
하다.

나는 어버이의 참한 딸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랬는지. 결혼을 하고 아이
를 낳은 뒤 조금은 알았다. 혼자만의 틀을 만들어 투정도 곧잘 했었고 많이
도 외로워했던 것이 나를 성숙하게는 했을지언정 곁에서 보고 있던 어버이
는 가슴을 많이도 조렸겠구나 하는 뒤늦은 후회도 해본다.

그리고 나의 반쪽을 찾아 결혼도 하고 투닥거리며 서로의 가슴을 많이도 아프
게 했었다. 그러한 계기가 없다면 서로의 가슴을 열어보지도 못한 체 남이 
될 수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커다란 사랑과 믿음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여유도 찾았으니 싸움도 해봐야 남의 속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결혼 2년만에 아이를 갖고 눈물이 펑펑 나도록 기뻐도 했고 세상에서 제일 
큰 선물인 사랑스런 아이를 낳은 후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드렸던가 꿈인지 생
인지 하며 어버이노래 부르며 아이를 그렇게 보살피고 있다. 하지만 아이가 
커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늘 조심스러우니 이것이 부모의 몫이
라면 나의 어버이도 지금까지도 마음조리며 살고 계시겠지. 바르게 살고 올바
르게 꿈을 갖고 이룰 수 있게 삶의 투자도 아끼지 말아야겠지 하지만 돌아보
면 어김없이 다가서는 ‘나’라는 존재, 나를 힘들게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결혼 7년차. 종가집 둘째 며느리. 나름대로 슬기롭게 해왔어도 결국은 아무
런 빛도 없는 서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이제는 모르는 것 빼고 다 안다고 큰
소리 쳐보지만 큰일 생기면 몸부터 쪼그라짐을 어쩔 수 없다.

어버이의 자식, 남자의 아내, 아이의 엄마, 그리고 나. 욕심은 없지만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나로 인해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이 없기를 늘 소
망한다. 삶
은 보여주는 것이라 착각해서 포장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결국 상처뿐. 
하지만 그런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 나의 한쪽을 비워둘 참이다. 필요하다면 
인내와 지혜가 번갈아 앉을 수 있게 따뜻한 가슴으로 항상 있기를 기원한다.
“엄마 수건 주세요.”
6살박이 아들이 부른다. 어떤 것이 우선인지는 모르지만 늘 교차로에서 부른 
곳을 향할 것이다. ‘삶이란’ 알기란 터무니없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