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석의 북카페|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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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뼈아프게 경험한 목사의 삶

조지 마즈던|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시대|복있는사람|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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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교회 현실 불구하고 불후의 명작 일궈내”
 

이 책을 덮고 나서 천천히 두 가지 질문이 내 뇌리로 걸어 들어왔다. 인생의 어느 길에 서야 할 것인가, 목사의 삶은 꼭 이렇게 끝나야만 하는가. 두 질문 중 처음의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벤저민 프랭클린이 걸어간 인생관에 걸린 문제요, 나중의 것은 에드워즈의 목회 인생을 두고 떠올린 것이다.

 

이 두 사람 다 동시대인이요 청교도적 배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두 사람 모두 과학에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피뢰침과 다촛점 렌즈를 발명한 프랭클린은 자연법칙이 우주를 움직인다는 이신론을 따른 반면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에 계시는 인격적인 곳으로 바라보는 유신론을 따랐다.

 

이처럼 다른 토대로 출발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과정 속에서 그 토대를 현실에 적용하고 또 글로 썼다. 프랭클린은 미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 애국자요, 에드워즈는 대각성운동이라는 신앙 혁명에 헌신한 목회자다. 천연두로 50대 초반에 사망한 에드워즈보다 프랭클린은 무려 30년도 더 넘게 장수한다. 결론에서 지은이는 이 두 사람의 삶을 이렇게 평하는데 “역사는 각성운동보다 혁명을 더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억한다. 아마 에드워즈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결론이 첫 질문에 대한 나의 적절한 답이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의 답을 찾기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에드워즈의 말년은 치밀어 오른 분노와 뼈 속 깊이 느껴지는 배신감에 어금니를 꽉 깨물지 아니하면 이겨내지 못할 지경까지 치달아갔기 때문이다. 현실과 조화를 이루는 자기 개혁적인 에드워즈가 맛본 교회 현실은 그 자체로 정말 냉혹했다. 
성찬 참여 자격을 두고 목사와 회중 사이에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논쟁의 핵심은 세례교인이 곧 성찬 교인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였다. 에드워즈는 형식적 세례만이 아닌 ‘신빙성 있는 고백’도 필요하다고 제시한 것이다. 이 온건한 개혁을 회중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임 목회자인 스토다드의 입장을 뒤집는 일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소수의 지지만 얻게 된 그는 즉각 해임되었다. 젊은 나이인 26세에 외조부의 후임으로 노샘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20년 동안 섬긴 그였지만 그의 말로는 고통의 극치 상태였다.

 

이 고단한 목사의 삶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목사는 교회와 결혼한 남편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이 말 속에는 애증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목사가 교회로부터 배신을 당할 수도 있고 교회가 목사로부터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은 어느 곳에나 상존한다. 
이 문제를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지상의 교회는 복음 신앙보다도 인간의 전통과 감정을 더 앞세우는 어리석음을 떨쳐내기가 여간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복음에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인간 본성 자체가 악해서 그러한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 복음 내용이 현실 교회 안에서는 그리도 힘을 발휘하기가 어렵단 말인가. 그러니 믿음이란 인간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진리에 우리는 찬동할 수밖에 없다.

 

목회에서 좋은 이들을 만나게 해주시라고 기도하라는 선배들의 조언은, 고통의 자리를 면하고 싶은 소극적 태도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인 우리는 이처럼 연약하다는 고백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에드워즈가 이 땅에서 받은 보상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대가족을 이끌고 인디언 선교지로 떠나야 했던 그의 삶을 읽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섭리까지 따지고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각은, 열악한 그곳에서 쓴 두 권의 빼어난 저술이 그의 상급이라는 데까지 미쳤다. 지금도 읽히는 『참된 미덕의 본질』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그것이다.

 

이 땅에 서 있는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에드워즈의 삶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서로 아픔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부부와도 같은 목사와 회중이 서로 인간의 감정을 앞세우면 질그릇 속에 담긴 복음의 광채는 찬연히 빛날 수 없다는 교훈이다.

 

|조주석 목사, 합신출판부편집실장, chochuseok@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