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석의 북카페| 생각을 담아 세상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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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석의 북카페

은혜 없는 사회 변혁 가능한가

생각을 담아 세상을 보라

손봉호|286면|노잉힘|2008

“오로지 자신의 책임 다하는 것에 역점 두어야”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한국
의 전통적 세계관이 전혀 기독교적이지도 않고 또 세계화되고 있는 현대 문
화가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라 형성된 것도 아니어서다. 손봉호 교수의 얘기
다. 
그럼에도 왜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살려고 애써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고
통이 우리 사회에 늘 현존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은 악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온다. 가뭄과 홍수나 지진과 해일이라는 자연
의 악뿐 아니라, 욕망과 야망과 폭력과 살인이라는 온갖 종류의 인간의 악으
로부터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현대인은 이전 시대보다 더 가까이 연결되어 
있고 익명적이어서 훨씬 더 고통당할 위험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다시 주장되는 
기독교적 세계관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사람이 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문화의 발전과 긴밀히 연계된 까닭이다. 달구지 모는 사람이 잠깐 졸았다 해
서 큰일 날 건 없었지만 버스 기사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가 잠깐 조는 
사이에 대형 인명 사고가 날 수 있어서다. 이런 예들은 부지기수다. 과학 기
술이나 문화의 발전으로 우리가 더 편리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류의 불행도 훨씬 더 커졌다. 그런대도 우리의 책임 의식은 그만큼 자라나
지 못한 상태다. 
그러면 이러한 악의 근원지는 어디일까. 나쁜 머리인가, 나쁜 제도인가, 좋
지 못한 기술인가, 유한한 인간 존재인가. 물론 이런 것들도 원인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근원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면 인간의 도덕
적 악이란 인간의 의지와 늘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쁜 머리나 나쁜 제도나 인간의 유한성과 같은 객관적 사실의 문
제는 그 근원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존재론적 설명에 대해서, 칸트
는 “존재에서 당위가 도출될 수 없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거부한다. 

n그렇다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놓고 그 최후 책임을 유한한 인간을 만든 창
조자에게 결코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려는 데서 발생
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
하고 범행을 저지르며, 더 근본적으로는 거짓 신들을 숭배하고 이데올로기
를 추종한다. 이러한 모든 행위들을 가리켜 성경은 ‘죄’라고 한다.
이 세계에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세계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고대 신화에 따르면 이 세계는 사람이 아기를 낳고 짐승이 새끼를 낳듯 이 
우주가 생물학적으로 생산(generation)된 것이다. 
신들이 우주를 생산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르게 서술한다. 토기장이
가 옹기를 만들고 자동차 공장이 자동차를 만들어 내듯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제조(fabrication)해 내신 것이다. 이 제조의 방식을 옛날 원시
인들은 우리처럼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오직 무엇이 새롭게 생기는 것
은 짐승이 새끼를 낳고 사람이 아기를 낳았을 때 경험해 본 것뿐이다. 그래
서 성경의 우주 창조 이야기는 정말 독특하다.
인간의 고통은 인류 사회 속에 늘 존재해 
왔다. 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
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사회 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최전선에 진보주
의자들이 늘 있었다. 그들은 기득권 보호에 앞장서는 보수주의자들을 비도덕
적이라고 비판하고, 그 상황을 바꾸는 사회 변혁 자체를 도덕적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수 없다. 왜냐하면 우
리는 진보주의자들과는 달리 도덕적 악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야

지은이에 따르면 사회 개혁이란 거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또 성공한
다 해도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따라
서 자랑할 것도 없다. 그냥 자신의 책임만 다할 뿐,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신
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그는 ‘선지자적 비관주의’라고 이
름 붙인다. 
내가 보기에 ‘제조’, ‘고통’, ‘변혁’이라는 세 개념으로써 기독교 세
계관을 새롭게 풀어내어 기독교 사회 변혁을 도모한 이야기가 구체적인 실
천 사항으로 확대되지는 않아 아쉬움은 남지만 노학자가 후대에 남긴 선물
인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