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석의 북카페| 완전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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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석의 북카페

우리의 지성이 평안을 누리려면

완전한 진리

학교에서 배운 것과 교회에서 배운 것이 서로 충돌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
까. 지적 혼란이 생긴다. 이 책의 저자가 고교 시절에 그런 홍역을 치렀다. 
혼란이란 지성적 무질서를 뜻한다. 자신의 지성 안에 이런 무질서가 생기면 
심리적으로 안정이나 평안을 잃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이 혼란에서 벗어나
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이리저리 생각도 해보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도 
나눠보고 이 책 저 책을 뒤지기도 한다.

지적 혼란기에 빠지기도

왜 지식의 차이가 생기는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 서로 다른 세계관에 따라 
사고하기 때문이다. 자연이나 사물이나 사회 현상에 대해서 그가 보는 관
점, 즉 세계관의 차이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다윈주의
자는 자연적으로 우연히 발생했다고 하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를 말

한다. 이렇게 동일한 문제를 놓고도 어느 세계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사람은 
전혀 다른 지식을 생산한다.
종교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개인 구원의 메시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세
계를 해석해 낼 수 있는 틀이 있다. 기독교 신앙도 그런 기능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앙은 단지 체험의 문제만이 아닌 진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말은 기독교가 총체적 진리라는 뜻이다. 책의 제목도 그것을 지시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제1차 부흥운동 이래 200여 년 동안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은 개인 경건과 구원이라는 한쪽만 강조했지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해석해 
내는 일에서는 개인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결과 미국 사회
에서 기독교 신앙은 인지적 내용이 없는 개인의 체험 문제로 좁혀진다. 교실
이나 학문 세계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기독교 신앙을 말하면 안 되는 금기가 
생기고 입법화가 일어난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독교 신앙보다 과학적 세계관이 훨씬 우세한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비지성적 복음주의로는 자신의 지성을 설득할 수
도, 자신의 믿음을 버텨내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성경의 믿음이 이 세상

을 설명해낼 지식으로는 합당하게 보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낸
시 여사처럼 고교 시절에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글을 써서 
솔직하게 불신 선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대적 세계관들이 왜 합당하지 않은지 그 뿌리째 흔들어 놓았던 라
브리의 쉐퍼 박사를 접한 후 저자의 기독교 신앙은 다시 새롭게 살아나기 시
작했고 지성의 질서도 찾아가게 된다. 그 후 30여 년이 넘게 성경의 말씀으
로 현대 문화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구원과 인
생과 온 우주의 궁극적 질문에 답하는 총체적 진리라고 변증해 낸다. 이러
한 삶의 결실로 이 두툼한 책이 나올 수 있었다.
본서는 미국의 복음주의가 체험과 느낌을 중시한 나머지 점차 지성을 잃어
간 역사의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저자 자신을 넘어지게 한 근본 뿌리도 밝혀
낸다(제3부). 또 다윈주의가 과학과 윤리와 교육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
고 있으며 그것이 어디에 잘못이 있는지도 가려낸다(제2부). 사실/가치, 사
적 영역/공적 영역이라는 이중 구조는 그리스도인에게 대단히 치명적인데 이
를 극복하려면 기독교 세계관을 확고히 세워야 하고(
제1부), 이러한 정립이 
한낱 정신적 운동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이 동반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도 한다(제4부).
전문성 면에서 고도의 교육은 받았어도 자기 분야의 중심 주제를 성경적 세
계관에 따라 해석해 낼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사람에
게는 기독교 신앙이 총체적 진리로 작동하지 못하고 사적 영역에 갇히고 만
다. 복음의 능력이 문화 속에 들어가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말이다. 성화
가 단지 도덕적 차원만이 아닌 지성적 차원에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외치는 
교회의 설교나 가르침이 정말 절실한 현실이다. 이런 높은 이상을 갖는 개혁
신학이 실천에 옮겨져야 당대의 지성과도 한판 겨룰 수 있다. 

신앙은 총체적 지성 갖춰야

우리의 지성은 질서를 찾아야 비로소 평안도 소명도 갖게 된다. 이것이 본서
가 기독교 지성을 꿈꾸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