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석의북카페| 외로운 길을 걸어간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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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길을 걸어간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서평-조주석 합신출판부 실장 press@hapdong.ac.kr> 

유해무 지음/헤르만 바빙크-보편성을 추구한 신학자/258면/살림/2004년 10
월 발행

입춘이 지났다. 따스한 봄기운이 수척한 내 얼굴에도 가벼이 느껴진다. 점심
을 먹으러 오가는 사무실과 생활관 사이에서 맛본 며칠 전의 즐거움이다. 우
리보다는 훨씬 북쪽이지만 1월의 평균 기온은 영상 2~3도 안팎인 온화 다습
한 나라가 있다. 이천이 월드컵으로 방방곡곡을 뜨겁게 달구게 각인한 히딩
크의 나라, 네덜란드다. 그렇더라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바빙크와 카이퍼의 
나라요 개혁교회의 나라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자기가 속한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
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가? 어느 누구라도 의당 삶의 내용으로써 이 물음
의 답을 하늘 아버지 앞에 내놓아야 한다. 1세기 전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
크(1854~
1921)는 어떤 답을 내놓았던가? 이 책은 정직한 필치로 바빙크를 그
려낸다. 부풀리지도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전반부는 그의 생애를 다루고(1~5
장), 후반부는 간략히 신학사상을 요약 평가하며(6~10장), 끝장에서는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모색한다.

바빙크는 분리측 교회의 출신이다. 부친은 그 교단의 목사였다. 자유주의 성
향의 레이던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개혁신학에 튼실히 섰고 신학박
사 학위도 받았다. 분리측 교회가 획득한 최초의 것이기도 하다. 캄펀신학
교 교수로 임명되어 10여년 동안 두 교단(분리측과 애통측)의 통합과 두 학
교(캄펀신학교와 자유대학교)의 합병이라는 난제를 끌어안고 씨름한다. 이 
과정에서 오랜 지기들과 감정의 골도 깊어갔고 자신의 약점도 노출했다. 두 
교회의 통합은 이루지만 학교 합병은 끝내 이루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그의 
신학세계는 우리에게 훌륭한 유산으로 남는다. 신앙과 문화를, 창조와 재창
조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망하여 기독교문화를 창달하려 한 탁월성 때문
이다.

네덜란드 교회는 1816년에 국가교회가 되었다. 이 국가교회를 개혁하려는 신
령한 싸
움은 영국의 청교도주의와 독일의 경건주의라는 새 기운에 힘입어 전
국을 강타한다. 국가교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분리하자는 외침이 있는가 
하면, 그 안에서 개혁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50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두 
개혁교회가 나온다. 하나는 1836년에 조직한 분리측 교회요, 다른 하나는 
1887년에 카이퍼를 중심으로 조직한 ‘애통’ 측 교회다. 이 둘의 통합을 위
해 견인차 노릇한 사람은 바빙크였다. 1892년에 통합한 ‘네덜란드 개혁교
회’의 탄생으로 우리는 뿌듯한 화합과 희락의 교회역사를 갖게 된다.

허나 아쉽게도, 두 학교의 통합은 이루지 못한다. 캄펀신학교는 분리측 교
단 신학교로, 자유대학교는 애통측의 학교로 남는다. 바빙크의 끊임없는 중
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상한 통합 학교는 역사에 탄생하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신학의 부재였는가, 리더십의 부재였는가, 편협성에 사로잡인 
교단주의였는가. 바빙크는 개혁교회를 참으로 사랑한 학자였다. 그럼에도 양
편으로부터 모두 오해와 버림을 받아야 했다. 그가 지도자로서 역량을 더 보
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중재의 과정 속에서 간혹 보인 결단성
의 
부족이나 미숙한 일처리 방식, 또 냉혹한 교회정치의 현실 속에서 지혜롭지 
못한 순진성이 그런 예들이다. 

우리를 들여다보자. 갈기갈기 찢긴 장로교회들의 합동과 수많은 신학교육기
관의 통폐합은 참으로 요원할 것 같다. 이런 엄청난 과제는 그만두고라도 신
학교 운영을 놓고 인준이다 직영이다 설왕설래하는 우리의 문제는 또 어떻
게 풀어야 하는가. 결코 사익의 편에는 서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편에 서
서 연약한 교회 현실성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도 장로교회의 이상을 손에서 
놓지 않는 역동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沈黙精進 與主同行의 리더십이 꼭 살
아나야 한다.

책을 덮으며 선명히 그려지는 한 상이 있다. 사대성의 청산이라고나 할까. 
서구 개혁교회도 나약성과 허물을 보였다는 저자의 올곧은 지적에서 그런 소
리가 들렸다. 믿음에는 반드시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 지식이 항상 믿음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확인을 또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