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개와 붙은 진돗개?_정요석 목사

0
34

똥개와 붙은 진돗개?

 

< 정요석 목사 · 세움교회 >

 

 

“신학이 지시하는 곳을 바라볼 때 하나님 은혜도 알게 돼”

 

 

손으로 TV를 보라고 가리키면 손만 바라보는 그 진돗개는 품종이 좋은 수컷과 짝을 맺어 새끼 4마리를 낳았다. 어미는 혀로 온 몸을 핥아 주고, 새끼들의 오줌과 똥을 모두 받아먹었다. 새끼들은 어미가 오줌을 누려고 일어나기만 해도 젖을 물고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두 달여 새끼를 정성들여 키우고 나면 어미는 몰골이 앙상해졌다.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 안타까워 우리집은 임신하지 않는 수술을 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진돗개는 대문이 열린 틈으로 빠져나가 동네 개와 교미를 하고 말았다. 참으로 볼 품 없는 똥개와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알려주었다.

 

우리집은 서둘러 동물병원으로 데려가 수술을 시켰다. 수술을 받은 진돗개는 안 그래도 힘든데 링거병을 맞은 채 집까지 걸어오느라 더욱 힘들어했다. 집에 다 도착하여 헉헉거리며 고통스런 표정으로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 눈길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런 진돗개가 불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였다. 왜 진돗개는 발정기가 되면 어떻게든 교미를 하려고 할까? 왜 자기의 품위도 잊은 채 불 품 없는 똥개와 붙는 것일까? 왜 처음 정을 준 첫 남편을 잊어버리고 아무하고나 붙는 것일까?

 

그렇다고 진돗개를 앉혀놓고 회초리를 들고서 가르칠 수도 없는 일이다. TV를 보라고 손으로 가리키면 손을 보는 자에게 정조와 일부일처와 품위와 절제라는 개념을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우리 부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5살부터 13살까지의 아이 5명을 혼내곤 한다. 서로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싸우고, 서로 인터넷을 하겠다고 다투고, 숙제를 게을리 하기 때문에 혼낸다. 그때마다 양보와 기다림과 절제의 미덕에 대해 가르친다.

 

그러고 보면 개들과 달리 아이들이 불평등하게 부모에게 혼나고 잔소리를 듣고 때로 매까지 맞는 것은 그들에게는 설명을 알아듣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알아듣는 머리가 없다면 개들처럼 그저 욕구에 따라 자유롭게(?) 살터인데 그 알아듣는 머리 때문에 고생을 한다.

 

나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하곤 한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한다. 나의 말이 가리키는 하나님을 보지는 않고, 내 말만 쳐다본 채 시비를 거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 사람이 되어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면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만큼만 그리스도인들이 살면 이 세상은 더 평화로울 것이라고 화를 내기까지 한다. 그들에게는 죄인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이해를 해도 성경이 말하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조차도 없다. 그들은 엄밀히 말하면 정조와 일부일처의 개념이 없는 진돗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이라는 내적인식의 원리를 주시지 않았다면 나 또한 발정기의 진돗개처럼 내 마음의 욕구를 따라 살아갔으리라. 그 믿음이 없다면 나 또한 예수라는 33살의 청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나의 죄가 사해져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지루함과 갈등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이 믿음이 없이 어찌 내가 단풍으로 물든 가을산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을 들으며 주님의 솜씨를 노래하겠는가? 아마도 중년의 권태기로 나른한 내 또래들처럼 나 또한 어느 멋진 여성을 꼬드길 생각으로 마음이 자극되었을 것이다.

 

처음 목회할 때 왜 이리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그 말들을 하기만 하면 성도들이 변하는 줄로 알았다. 그래도 안 변하면 직접적 표현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변화 대신에 교회서 튕겨나갔다. 그래서 아예 말할 기회마저 날려버렸다.

 

지금은 누가 교회에 나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오기만 하면 듣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 때에 변하는 것이다. 일부러 어떤 성도에 맞춰 말하지 않아도 된다. 맞춰서 말하면 어떻게 그리 잘 아는지, 오히려 반발할 뿐이다. 3개월, 6개월, 1년이 되면 맞춰 말하지 않아도, 해야 할 말을 다 하게 된다. 성경의 권위로 떳떳이 다 하게 되고, 때가 되면 그들은 받아들인다.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다루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제7장 3절에서 은혜언약에 관하여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제공하셔서, 그들이 구원 얻도록 그에 대한 믿음을 그들에게 요구하시고,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믿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만 하시지 않고 성령을 주시어 우리로 믿는 것을 원하도록 만드시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크신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실 때 그것을 받는 믿음이라는 수단마저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때가 되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우리로 더욱 성장하도록 길러가시는 것이다. 그 부르심과 성화까지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구원의 수단인 것이다.

 

때에 따라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하고픈 날선 말로 가득 찼던 나의 목회는 성도들을 향한 긴 기다림과 어울려 나아간다. 성도를 향해서만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나를 향해서도 기다린다. 나의 성질과 욕구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이것들을 잠재우는 것은 나의 노력 이전에 구원과 함께 부르심과 칭의와 양자와 성화라는 수단까지도 약속하신 하나님께 있다. 그 하나님만이 나에게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하시며 나를 길러가신다. 나는 이것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