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역사의 교훈과 개혁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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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과 개혁신앙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한반도의 미래가 세계의 미래처럼 그렇게 밝지는 않는 것 같다. 천안함 사건으로 인하여, 북한에서도 자유를 위해 싸우는 자들에게, 그들에게 지지자들이 있고 그들을 돕는 수단들도 준비되어 있다는 확실한 메시지를 주어야 하는데, 그 시기를 이미 놓쳐버린 것 같다.

  

물론 거기에 아직 국력이 미치지 못하고 실제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들이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한반도 역사에 있어서 아무리 잔인한 폭군이 있었다 해도 그렇게 오랫동안 한반도의 구성원들 다수의 인권이 그렇게 김일성 한 가족에게 유린당했던 역사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비극을 피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마 그 가족이 스스로 한반도의 모든 구성원들의 피해를 보상하는 절차를 밟는 길일 것이다. 그런 기대가 너무 순진하다면 그런 역사를 짧게 하기 위해서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동북아에서의 주도권도 일시적일 뿐이다.

 

북한에 대해서 권리행사를 행할 수 있는 발판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그것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단지 시설과 그 운영권이다. 독일의 통일과 같이 높은 비용을 들여 통일을 이루고자 하지 않는다면, 중국에 남한의 경제개발의 모델을 전수한 것과 다른 좀 더 개선된 모델을 추천하여 북한 스스로 복지사회로 가도록 체계적 발전모델을 제시하고 돕는 방식들을 확고히 세워 놓아야 할 것이다. 북한에게 선례가 되고 있는 중국이 체제유지를 위해서 독특한 민주주의를 제창하여도 그런 시도는 실패할 것이 뻔한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란 긴 역사적 비판작업의 산물들이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주변지역들에 자유도시를 상당히 성장시켰어도 거기에 과거의 통치체제와 융화하는 방식이 필연적인 절차로 남아있었던 것처럼, 여전히 이상적이고 새로운 민주주의란 그렇게 쉽게 탄생되지 않는다.

 

지금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경우에도 그렇게 친환경적 에너지 시대를 강조하고 물 시대를 강조하고 있어도 현실적으로 항상 제2차 기술개발에 익숙한 지도자들의 생각에 막혀 세계에서 가장 첨단적이고 가장 친환경적인 에너지 기술들이 첨단기술로 취급되지 못하는 현실도 당연한 것이다. 그런 기술들은 2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진정한 인류를 위해서 그런 혁신을 수용할 수 있는 미국으로 넘어갔다.

 

다행히도 그렇게 많은 전기에너지가 필요로 하는 미래 전기자동차 시대에 핵융합에너지 기술이 한국에서 조금 진척을 보인 것은 기쁜 일이다. 그것도 선진국들이 실패한 제2차 기술을 이 땅에서 성공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교회 현실들도 그런 경우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 사도시대와 같은 많은 고난과 핍박의 시대에 오히려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같은 이상이 심어졌다 할지라도, 그런 가르침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들이 모두 이상적인 교회가 되었는가는 검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의 이상이 현실화된 것은 긴 역사적 비판 작업을 거쳐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에서 그 이상이 실현되었을 뿐이다.

 

긴 역사 속에 개혁교회와 그 신학이 어떤 지역에 제한적으로 심어졌을지라도 그런 교회나 신학이 후대에까지 계속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개혁교회 안에 살며시 들어온 다른 가면을 한 카톨릭 주의(반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반드시 표현해야 할 성경적 진리 부분을 살며시 생략해 버린 방식으로 들어왔었다.

 

그와 같은 작은 계기일지라도 긴 역사 과정에서 보면 교회 자체를 땅 위에 사라지게 하는 출발이 되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프로그램 하나가 예배 속에 들어오게 되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고, 시간이 더 지나 그런 예배가 사라질 때에는 교회도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실제로 성경에서 표현된 바른 역사적 교회가 아닌 큰 교회들이 끊임없이 그렇게 방황하는 교인들을 흡수하고 마지막 거기에서 세속화되어 바른 교회들이 사라지고 있다.

 

참으로 교회를 위한 신학은 없다. 성경대로의 신학만이 있을 뿐이다. 성경적 개혁교회란 것도 없다. 정통개혁교회가 가장 성경적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정통개혁교회는 17세기 이후에는 공적으로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도르트 회의에서부터 카톨릭주의인 아르미니우스주의와 타협이 이루어진 역사이니 그 이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는 모토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이 그런 정해진 신학을 가리키고 그런 신학을 고백하는 교회를 바른 교회라 할 것이다. 더 바른 신학이란 그런 신앙고백서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신학을 의미하며, 더 바른 교회란 그런 신앙고백서를 철저히 따르되 그렇게 고백했던 사람들보다 더 철저하게 성경에 충실한 교회를 의미한다. 즉 진리의 규범인 성경 뒤에 사실로서 하나님께 더 충성된 교회를 의미한다.

 

교만이란 그런 추구에 대한 포기가 교만이요 사실로서 그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줄 모르는 것이 교만이다. 교회 현실은 그런 교만의 여러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데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교만한 죄인에게도 처음이나 끝이나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 하나님이 진리를 창조하시고 진리를 유지하시며, 그가 또한 참된 교회를 세우시며 그가 참된 교회가 계속 있도록 하신다는 사실이다. 참된 성도들이 있다면 그러한 사실 안에서만 웃을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