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아틀라스 실험’과 ‘시간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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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라스 실험’과 ‘시간 개념’

< 김영규교수 >
|·남포교회 협동목사·뉴욕과학아카데미(NYAS)·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

“삶과 죽음의 세계에서 하나님 외에 두려워할 자 없어”

근대역학의 시작은 뉴턴에게 돌리지 않고 르네상스 시대 이전, 즉 중세 후기
의 요한네스 부리다누스나 니콜라우스 오레즘에게 돌린다. 그들은 땅이나 하
늘에서 물체들의 운동에 대해 설명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에 반대하
여 운동을 힘의 가감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다. 

물체 운동 개념 
아직 정확치 않아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되는 힘(impetus)의 개념은 근원적으로 헬라어인 ‘루
메’라는 개념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 헬라어의 개념은 힘
의 개념에서도 사용이 되고, 회전하는 운동이나 스스로 흔들리는 진동에도 
쓰이기도 하며, 갑자기 돌격하는 운동에도 쓰이고 있다. 즉 가속도와 속도
가 구별됨 없이 그 개념이 사용되었다
는 말이 된다. 

문제는 그와 같은 헬라어 사용에 못지 않게 근대역학에서나 현대물리학의 경
우에서도 일반적인 운동이나 가속도, 힘의 방향, 비가역성, 시간 등에 공통
적으로 ‘화살’이라는 표상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개념들도 세
분화되었고 언어들도 세분화되었지만 그 개념들이나 언어들을 표상하는 구체
적인 표상 자체는 모순되게도 오히려 같은 표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와 같은 경우는 바로 의식과 함께 오류들을 범하고 있는 지향성 자체의 오류
들과 판명성 오류들이 함께 만나는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느끼는 ‘뜨겁다, 차갑다’ 등은 ‘아프다’와 같이 우리의 뇌
에서 외부의 자극들로부터 지각의 센서들을 통해서 얻어진 정보들이 이동하
여 뇌에 뿌려주고 펼쳐지는 특별한 세계이다. 외부 정보들의 마지막 종착점
들인 맛 자체나 색상 자체는 그것들을 대신하여 설명할 수 있는 다른 표상들
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온도나 시간, 운동의 원형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을 모두 쉽게 화살표로 대신할 수는 없다. 

세상에 알려진 대표적인 물리학자들도 운동이나 시
간을 화살표로 표상하고 
있다. 공간이나 시간이라는 개념들 역시 마지막에 만나는 두 개념들로 생각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한 개념들은 인간
이라는 전체 인자를 빼고 나면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는 개념들이다. 

우주에 말려져 있는 모든 차원들이나 외부로부터 오는 모든 정보들과 상대적
인 방향에서 자신을 정지점으로 생각하여 ‘시간’이라는 개념을 표상하는 
경우도 비슷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환원주의에 기반을 두는 과학적 
사고나 역사적 사고는 모두 틀리게 된다. 

최근 제네바에 있는 거대 입자가속기에서 소위 ‘아틀라스 실험’이 그동안 
중지되었다가 지난 3월 30일 12시 58초로부터 그 실험의 결과물이 나오기 시
작하여 비로소 성공하였다고 발표되었다. 
5 테라볼트(5 TeV)를 넘어서서 7 테라볼트(7 TeV)에서 입자들이 충돌할 때 
블랙홀의 세계가 열릴까봐 걱정했던 시민들도 있었지만, 그런 세계는 열리
지 않았다. 그리고 2009년 2.36 테라볼트(2.36 TeV)의 에너지의 단계에서 얻
은 결과와 큰 차이가 없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향후 기술적으로 가능한 
14 테라볼트(14 T
ev)의 에너지 단계까지 끌어 올려 그 결과들을 기대할 것이
다. 

문제는 과연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기반을 둔 에너지 개념만이 있겠느
냐는 것이다. ‘빅뱅’이라는 개념은 우주가 가속으로 팽창하는 현상과 근원
적 입자의 세계로 가면 갈수록 에너지가 커져 가는 현상에 의해서 소급해 가
는 우주 물리적 역사 사고의 기초 개념이다. 그러나 그런 개념도 절대속도
와 절대가속도가 아인쉬타인의 절대속도라는 개념과 맞물러 있다. 즉 절대속
도와 절대가속도가 같은 또 다른 절대속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학자들에 따라 현 우주 현상 뒤에 있는 모순들을 설명하는데 따르는 
절대속도를 이미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와 같은 비과학적인 
‘빅뱅’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개념의 근본적 오류는 
‘폭발’에 대한 근본적 오해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폭발에는 더 작은 세계로 쪼개어 질 수 있는 방향이 있어야 되지만, 중력
입자와 같은 입자로 더 이상 쪼개어 질 수 없는 방향이 없다는 데서 융합이
든 분열이든 최초에 어떻게 ‘폭발’이라는 개념을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너지라는 개념도 절대속도와 절대가속도가 같은 세계 자체에는 사용할 수 
없는 개념일 수 있다. 

오히려 그와 같은 절대속도와 절대가속도는 같은 세계가 다른 한 차원을 열
면서 어떤 입자로 수축되었을 때에 열리는 다른 차원을 향하여 그 입자나 입
자들이 절대속도로 운동하게 될 때 비로소 에너지 개념이 적용되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적용된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아마 거기에는 
‘빅뱅’보다 ‘조용한 시작’이 더 합당할지도 모른다. 

시간이라는 것도 우리가 정지점으로 되어 있는 시간의 표상이 아니라 그 첫 
입자가 다른 한 차원을 열거나 더 이상 절대속도와 절대가속도의 세계 자체
로 가지 못하여 다른 차원을 향하여 절대 운동을 해야 하는 운동의 그 방향
과 정 반대인 비가역적인 정지의 방향이 물질세계 안에서 말하는 시간의 진
정한 개념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닫혀진 시간의 세계만이 절
대시간일 수는 없다. 

아마 우리 육체의 세계 뒤에 영혼의 세계가 기원하는 절대속도와 절대가속도
가 같은 또 다른 큰 레벨의 세계들을 가정한다면 우리의 시간의 세계로부터 
닫혀진 더 긴 시
간의 세계가 있을 수 있음을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보 단위로 수축될 수 없고 어떤 긴 시간의 세계나 에너지
의 세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은 항상 그 모든 세계와의 관계가 그 세
계들 안에 ‘인격들’을 창조하신 그 인격들과 다른, 아마 원형으로서 고유
한 본질적 속성들이나 품성들을 가진 자로서 명령하고 말씀하시는 자로 모
든 세계 밖에 그리고 가장 에너지가 큰 가장 작은 입자에게도 항상 명령하시
고 말씀하시는 자로 그 입자 밖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세계 구별해야

따라서 그 하나님이 친히 자기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그
들의 삶과 죽음에 있어서 하나님 외에 두려할 자가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 
자유란 거기에서만 진정하게 쓸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