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자의 길’ 참관기> 이 시대에 설교자로 살아가는 길_노승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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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설교자로 살아가는 길

 

<노승수 목사, 강남성도교회>

 

묵묵히 시간 속에서 자기 삶을 살아내는 것이 설교자가 견지할 자리

 

12월 1일 남포교회에서 일병목회연구소 주최로 박영선 목사의 특강 ‘설교자의 길’이 열렸다. 오전은 설교자가 가지는 대표성에 대해서, 오후는 설교자의 삶이 가지는 구체성에 대해 특강이 진행되었다.

 

참석인원으로 150-200명 가량을 예상한 강의는 400명 이상이 참석해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만큼 박영선 목사의 설교와 설교자에 대한 이 시대 설교자들이 갖는 목마름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보통 설교자를 생각할 때, 설교 스킬이나 청중을 끄는 법 등의 방법론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강의와는 달리 박영선 목사는 설교자 자체에 초점을 두었다. 곧 설교자의 설교 행위가 아니라 설교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그의 정체성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는 설교자의 스피릿과 설교자가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아냄으로써 그것을 설교에 녹여내는 사람인지를 의미한다.

 

1.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설교자의 대표성

 

오전에 이뤄진 특강의 주제는 설교자의 대표성이었다. 설교자의 대표성은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육신이 되는 이 일이 ‘구체성’이라면 그렇게 육신이 되심으로 육신적 존재들과 동등한 지위와 정체를 가지는 일을 하시는 것이 ‘대표성’이라 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가 우리 형제 중 하나가 됨으로써 그가 가진 지위가 우리 모두의 지위가 되는 연대성이 바로 대표성이다.

 

하나님은 모두를 위해서 하나를 뽑으시는데 그가 우월하기 때문에 뽑는 것이 아니라 그들 전부를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대표로 삼으신다. 곧 하나님은 용서와 은혜의 영광으로 변변치 않은 설교자를 대표로 삼아 죄가 만든 비열함을 극복하게 하신다.

 

우리는 현재에 묶여있다. 따라서 설교자는 그 현실과 차별화되는 사람이 아니라 그 현실의 일부가 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그런 대표성을 가진 존재로 삼으셨다. 그래서 설교는 우리가 디딘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

 

설교자가 세상으로부터 나를 차별화하고 그 차별화로 자기 정체성을 삼는 것은 빈곤이며 비열함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대표를 자처하는 바울이 설교자가 취해야 할 자세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이 세상과 다름으로 혹은 어떤 교단에 속했음으로 혹은 누가 어떻게 틀렸다는 것을 비난함으로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다. 이같이 빈곤한 것이 있는가?

 

우리는 현재와 현실에 묶여 있다.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 가운데 들어가 그들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가 되어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설교란 그런 것이어야 하고 설교자는 그것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저것은 틀렸다. 그런데 나는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마음이 시원할지 몰라도 설교자의 스피릿은 아니다. 설교자는 대표성을 갖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과 함께 현재로 묶여 있다. 바울은 실패한 이스라엘의 대표가 되어 그들 전체를 견인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실패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코 폐하여지지지 않았음을 몸소 자신의 삶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그런 바울과 같은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

 

이는 마치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같다. 모두가 탕자를 힐난하지만 아들이 돌아옴으로써 그 아들을 위해 소를 잡는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두 다 실패한 것 같아도 그중에서도 그렇지 않음을 드러내는, 그래서 청중 전체를 그 설교자의 대표성과 묶이게 만들고 연대를 이루고 모두의 지위가 되도록 하는 그것이 설교자가 지닌 대표성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그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자리가 설교자의 자리이다.

 

2. 설교자의 삶으로 구현되는 구체성

 

오후에는 남포교회의 넉넉한 준비로 좋은 점심 식사와 교제를 나눈 후 1시 20분에 모여서 두 번째 특강, 곧 설교자의 구체성에 관한 특강이 이어졌다.

 

스토리가 없다면 누구를 설득하고 납득시키고 감동시킬 수 없다. 스토리 속에 우리는 몰입을 하고 그것을 따라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자기 시대를 살면서 자신과 함께 사는 이들의 이웃이 되는 것에서 구체성을 찾을 수 있다.

 

나와 같은 정황, 조건 속에 있는 것 그것이 예수의 삶이었다. 유대인의 정황, 로마와 적대 행위를 하지 않은 정황, 바리새인에게 격노하시지만 그들을 죽이시지 않는 정황에 예수가 서 있듯이 설교자도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역할에 서 있고 내 현재와 시간에 묶여서 내 역할을 맡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내 자리를 감당하는 것 그것이 ‘구체성’이다. 그 때 내 자리 내 정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구체성이다. 때론 후회로, 때론 분노로, 때론 낙심으로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 현실의 구체적인 자리에 서는 것이 구체성이다. 명분이나 당위, 설명과 비판으로 후퇴해서 자기 자리를 삼지 말아야 한다.

 

나침반은 방향을 가르쳐주지만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어떤 길이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을 가는 것이 구체성이다. 삶은 비전과 다르다. 우리는 막연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삶은 늘 사고를 당한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대형 사고다.

 

살아 있는 한 안전이란 없다. 삶이란 그 자체로 구체성이다. 이런 우연과 사고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성실하심을 직면하는 시간적 직면이 구체성이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하루가 아니다. 그것이 구체성이다.

 

아직도 하나님은 일하시고 그의 의지를 놓지 않으신다. 힘을 다하여 찾아오시는 예수, 그것이 설교이다. 설교란 그 구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로 사는 것이다. 매일을 사는 것이다.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치는 말

 

특강은 성공리에 잘 마쳐졌다. 박영선 목사는 해마다 한번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이 있을 때까지 이렇게 하고 더 해야 할 말이 없을 때 그만하겠다고 했다. 그것 역시 박영선 목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갖는 구체성이지 않을까 싶었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자리였다. 결국 그것은 내 자리로 돌아와 묵묵히 내 시간 속에서 내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설교자로서 내가 견지해야 할 자리이며 이 땅의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