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쇠고기 정국 시점에서 돌아본 신학의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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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 정국 시점에서 돌아본 신학의 왜곡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사실에 대한 본질적 판단 떠나는 것이 문제”

양심이 있는 생산자의 경우 자신의 생산품들 중에 최상급의 물품들을 시장
에 내어 파는 것이 일반적이다. 

생산자는 자신의 최상품 팔아야 

국가 간에 조약이나 합의의 경우에도 인간적 양심의 기본적 가책을 뒤로 미
루고 마치 처음부터 사람이나 짐승에게 치명적인 해가 되는 식품을 이웃 나
라에 팔고자 의도를 비추는 것 같은 협상 내용들이 발견되었을 경우 서로 간
에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 자신의 양심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나서서 그런 실
수들을 수정해야 하는 것은 예의 국가의 기본이다. 
세계의 한 구석의 일들이 이웃집에서 일어난 일처럼 빠르게 알려지고 경우
에 따라 한 가족처럼 움직이는 지금의 지구촌에서 어떤 평화 체제가 있다면 
국가 간
에 그런 최소한의 예의가 기본이 될 때 이루어진다. 짧은 시간을 두
고 보면 그런 행위에 의해서 이득을 얻은 자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
지만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그런 실수를 행한 당사자가 더 치명적인 해를 입
게 되기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이고, 이런 쇠고기 협상에 대한 문제를 
통해서 한국이 배워야 할 것은 지금도 자원 외교와 경제 협력 등의 명목 하
에 다른 이웃 국가들에게 비슷한 해를 끼친 국제적 협상 조항들이 있는지 꼼
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웃 국가들에게 당한 사실들에 대해서 
분만 낼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웃 국가들과 그 국민들에게 더 해를 끼
친 일이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교회의 세계 선교에 있어서도 과거 식민지 시대의 선교 활동이 이웃 국가의 
식민지화를 위한 선봉이 되었던 것처럼 이웃 국가들에게 그런 인상을 심는 
면이 없는지 조심히 살펴야 한다. 
우리 지각에 있어서 깊은 성찰이 없는 행위들조차도 이웃에게 해를 끼친 내
용들은 반드시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성경 그대로 선교한다고 해도 성경이 가리키고 가
르치는 그 하나님이 그들
의 하나님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자신들에게 임한 복이 
전하는 자들의 행위나 받는 자의 자의식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복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데까지 가지 않은 선교 행위들은 바른 선교 행
위들이고 말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 안에 그와 비슷한 극히 우려된 신학 사상들이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성경적 조직신학 혹은 성경적 신학이란 
기치아래 실제 성경을 파괴하는 운동들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 17세기 신학
에 있어서 코케이우스 신학이 새로운 언약신학을 내세우면서 삼위일체 하나
님을 파괴하였던 일과 같은 운동이 또 다시 반복되는 듯하여 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적 신학 아래 삼위일체 하나님을 파괴
하고, 진정한 언약의 실체의 통일성을 파괴하며, 이스라엘과 이방 그리스도
인들 사이에 용서의 차이에 대해서 비판하는 최근의 새로운 신학에 대해서까
지도 경고를 하고 있는 고백서이다. 
신학이나 설교에 있어서 사변이란 성경 안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언어로만 
남아 있을 때 그리고 
그렇게 남아 있는 동안 모두 사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의 논리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사변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공중의 새를 보
라 그랬으면 공중의 새들이 사실이다. 사실이란 들의 백합화를 만져 보고 생
각하는 것이 사실의 내용이다. 만져 보아서도 모른 것만큼 그 사실도 모른 
것이 바로 그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경대로 생각해야 할 것이란 바로 인간적 노동방식이 아닌 자연
적 생존방식에 의해서 사는 생명체들의 신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성경과 
함께 아직도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나 그 생각과 함께 굴리는 내적 언
어들이 사실이 아니라 우리 생각 밖의 들풀이 사실이요 그 들풀을 아름답게 
입히시는 그 하나님이 사실이다. 
모세에게 나타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그 언어들 앞서서 그 
언어들 뒤에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과 야곱도 죽었으나 지금 모세에게 나타나
신 그 하나님이 사실이다. 그런 사실로서 그 하나님과 함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및 성령 하나님이 사실들이다. 그런 사실들이 제외되면 성경 언
어들은 어떤 사실도 없다. 동시에 그 하나님의 속성들이 그 하나님과 함께 
제외되면, 성경
이 가리키는 모든 사실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초기 루터가 신학 안에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비판하였던 것은 그
런 철학으로부터 자유롭도록 성경 자체와 그 사실들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었
다. 그러나 그런 성경의 발견이래 신교 안에 존재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이나 라무스의 논리와 같은 사용들은 그 사실들의 보존을 위한 것이었
다. 
성경적 신학이 있다면 그런 개념들이나 논리들까지도 그런 사실들을 보존하
는데 방해하였을 때 성경적 사실들을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들이나 논
리들이 비로소 발견되고 대체되었을 때만 그런 성경적 신학이 가능하다. 그
러나 그런 개념들이나 논리들이 비판과 문제로만 남아 있는 동안 그런 신학
은 성경적 신학이 아니다. 
필자가 그의 신학적 내용들을 모두 받는 것은 아니지만, 1660년에 처음 출판
된 쮜리히 출신인 요한 하인리히 호팅거의 “신학적 여정”(Cursus 
Theologicus)에서 스콜라 신학을 참된 신학이 아니라고 정통(개혁)신학에서 
일반적으로 배척하는 기본적 이유들을 다음 인용하는 것으로 족하고자 한
다: 

성경 떠난 신학 결코 있을 수 없어

첫째로 
성경이 그런 신학을 정죄하기 때문이다(골 2:8, 18; 딤전 1:3, 6, 
7; 4:1, 2, 3, 7; 6:3, 4, 5, 20, 21; 딤후 2:14, 16, 17, 23; 딛 3:9). 둘
째로 그 신학이 성경을 유일한 원리로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 신학이 성경의 사실과 그 말들을 보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로 성경
의 참된 진리와 시적 양식과 유사성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참된 신학
과 동일한 목적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