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복과 보상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우리가 행하는 선은 하나님 속성의 발현”
지향적인 인간의 근본적 인식 방식에 따라 생물학의 인과적 근본 해답들은
일반적으로 화학이나 물리학의 원리로부터 풀고 있다. 따라서 과학적 발전
의 방향도 생물학으로부터 화학 및 물리학에게로 소급해 가는 방향으로 발전
해 왔다.
역순 밟고 있는 과학적 발전들
그러나 이제 입자물리학 분야가 점점 혼돈이 커가기 때문에 물리학의 종말이
란 말을 종종 듣고 우주가 가속으로 팽창하는 근거로부터 우주론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질서가 질서를 낳는 창발 이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유행하고 비 선형이나
혼돈 자체가 기본 법칙으로 이해하는 정도이다. 오히려 아인쉬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자체가 물질의 모든 근원적 원리로 있는 이상 그 가정은 시간
과 공간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입자의 세계로부터 이미 영원히 닫혀진 가장
작은 세계를 먼저 가정하는 것과 같다.
양자 물리학 자체가 그렇다. 영적 세계에 대해서 다른 절대 속도의 세계를
가정해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물리학과 생물학 사이에도 서로에 대해서 무한
히 수렴하여 만나지 않는 영원한 간격이 있다는 사실도 우주에 대한 전혀 다
른 이해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생물학이나 인간의
정신 세계의 가치는 심오해져 가고 그 의미가 커져가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보기 위해서 그리고 느끼기 위해서 뇌가 있고 몸이 있으며
소급해서 중력 세계나 우주의 첫 운동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부분이
풀려야 전체가 해명되는 탐구의 방향이었다면, 거꾸로 전체가 풀려야 부분
이 풀리는 탐구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매 자연 현상을
전체 잠재적 활동성(total potential activity)이라고 칭할 수 있을는지 모
른다.
그러나 모든 물질의 세계가 근원적으로 정보의 세계에 불과하다면, 그런 정
보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은혜의 내용과 형식에 불과하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면 그런 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가치는 무
엇일까?
사실 이웃이나 인류 혹은 어떤 이상적 가치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끊임
없이 불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안 적
어도 악을 행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이 자신에게 복이 되어 있는 것일 뿐인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행하는 인간 자신이 교만에 차서 그런 일
을 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남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셈일 것이다.
그런 선들을 행하는 자는 그렇게 선한 마음을 갖도록 하시고 그런 선한 일
을 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역사만이 그를 위한 진정한 역사로 남아 있을 것이
다. 그렇지만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과 너무 다른 길
을 가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채찍을 맞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
고 그런 굽은 길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계신다면, 그를 향한 하나님
의 사랑과 그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그에게 복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서 어떤 것을 나타내시고 어떤 일을 행하
시고 계시는가가 그에게 궁극적인 가치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
들 중에 자신 안에서 그의 의가 나타나도
록 하셨다면, 그런 일로 그 가치가
있을 것이고 만약 자신 안에 그의 사랑만이 나타나도록 하셨다면, 그런 일
로 그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미 자주 언급한 대로 창조된 역사나 그 피조물의 모든 역사는 그런 하나님
의 속성들이 나타나는 역사에 어떤 것을 첨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것은 없
을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런 속성들이 나타나는
일에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 그의 속성들이 나타남
으로 각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3장에 표현된 대로 자신의 불의조차도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면 어떤 것으로 하나님께 공헌한 것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의 거
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증명이 되고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런 선을 위해서 악에
남아 있자고 하거나 악을 행하자고 하면서 자신의 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만큼 자신에게 불행한 것도 없을 것이다.
악한 행위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 없이 자살로 끝나도 하나님께서 영원
히 그에게 반드시 보응하신다는 사도 바울의 대 선언으로부터 인류
는 무엇인
가 두려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스스
로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큰 자신의 자고함을 숨기는 비참한 행위들이다.
칼빈을 그 시대의 살인자로 몰아가는 것도 마치 자신은 적어도 그런 죄를 범
하고 있지 않다고 보이는 가시적인 행위들이다. 의도나 의식과 상관이 없이
제네바 도시가 세르베투스를 죽인 것 자체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시대
에 주시지 않고 이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어떤 환경일 뿐인 것이
다.
인간의 그 잔인스러운 행위와 그 폭력 앞에 자신이 그런 일에 특심을 갖고
그렇게 행해 버렸다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불행이었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같이 하나님 없이 사는 시간만큼 인간은 그 만큼 불행한 것이
다. 하나님을 위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들이 나타나는데 피조물로서 모든 것
을 포기하는 것이 그에게 가까이 있는 형식일 것이다. 즉 의식 자체에 하나
님이 없다는 것으로 불행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의식 자체나 그와 더불어
나타나는 역사들 안에 하나님께서 존재에의 소멸로 가도록 하나님의 속성들
을 나타내는 어떤 형태든 가장 불행한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보다
더 이상 큰 행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행복이다. 겸손도 하나님 없이 자
고함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것도 불행한 것이다. 남을 위해서 일하기 전에
남을 위해서 일을 한 후에 자신에게 자고함이 남아 있다면 거기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고함이 없는 심성은 분명 자신 안에 사실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의 역사요 선물이며 성령 하나님의 역사의 열매
이다.
선을 행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열매
생산은 생산되는 데 있지 않고 그 생산하는 과정이 모두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에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일이 이상으로 있지
않고 현실로 있는 것이 인간에게 진정한 복과 보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