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규칼럼> 과학과 인간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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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간의 욕망

김영규 목사
·NYAS, AAAS, ACS 정회원 
·남포교회 협동목사

21세기에 와서 교회와 그 신학과 관련해서 인간이 풀어야 할 과제가 없는 것
인가? 단순히 한국교회의 독자들을 위해서 이 칼럼의 글을 쓰지 않고 항상 
세계교회를 의식하고 글을 써야할 필자로서 당면된 어려운 과제 중 하나이
다. 

과학적 원리 규명 쉽지 않아

기나 긴 언어학적 훈련과 철학적 훈련을 거치면서 그런 훈련들을 통해서 풀
지 못한 궁극적 문제들과 싸우는 전 생애의 과정에서 성경의 기록은 객관적
으로 과연 진실한가에 대한 해답은 어느 정도 얻어 왔다. 그러나 그런 언어
문화와 문자문화에 조건이 되어 있는 다른 진실성, 즉 항상 자연이 무엇이
고, 인간은 무엇이며, 그 사실들이 뒤로 두고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세계와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으로부터 성경과 더불어 성경 안
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특별히 현대과학이 점점 더 신학의 중심문제를 
풀고자 접근해 오는 상황에
서 그들에게 해답을 주기 위해 현대과학의 실체를 가장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는 창조적 노력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다수의 동의나 다수의 전문적 견해들
도 중요하지 않다. 문제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풀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
는 자가 관심이 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계가 다 풀리지 않으면 그 어느 하나도 풀린 것이 없다
고 믿는 사람 중 하나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양자역학에 대해서도 비판해 왔고 극거시세계나 극미시세계에 있어서 열과 
온도 및 엔트로피의 개념들, 정보의 개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의문시해 왔
다. 
나는 지금까지 인간은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표상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지적해 왔다. 즉 어떤 것을 지향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며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들인지를 지적해 
왔다. 공간이나 시간을 없이하고 근원적 힘이나 에너지 개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중력파동에 대해서 표상하고자 할 때, 그 중력파동과 더불어 지금 우
주 안에 숨어 있는 차원들에 대해서 생략하고 과연 초끈으로 표
상할 수 있는
가에 대한 것이다. 그런 초끈이 있다고 해도 지금 주변의 차원과 같은 차원
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체를 부분으로 쪼개는 
지향성 자체의 오류와 판명성의 오류에 기반을 둔 환원주의 방식이라는 근본
적 오류에 빠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뇌에서의 온도 개념은 정보의 위치 개념이다. 물리적 절대온도 제로의 개념
도 궁극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는 개념이다. 운동을 시간과 길이로 분
리하는 것이 아주 어리석은 짓인 것처럼, 온도의 개념에서 위치와 공간의 개
념을 분리하는 일도 바보짓일 것이다. 더구나 물리적 실재에 대한 차원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수학적 차원이나 기하학적 차원으로 이해해도 바보짓이
다. 전기장과 자기장 사이 공간적 차원들에 대한 이해가 광자라는 힘의 입자
의 개념으로 다 사라지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간과 시간, 열과 에너지, 힘과 운동이 함께 묶여져 있다는 것을 발
견하였을 뿐, 아무 것도 해결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언어들이나 
잠정적인 표상들을 다 버려야 할 것인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인간의 가
장 치명적인 오류들이다
. 미지의 상수들을 만들어 그런 문제들을 피하는 것
도 바보짓이요 언어놀이에 불과하다. 그런 표상들을 컴퓨터 화면에 뿌려주
는 것도 넓게 놀이하는 행위로 언어놀이와 큰 차이가 없다. 
사실과 같은 그래픽은 무한히 환경과 대화하는 반응-발산 프로그램에 보이
지 않은 눈을 삽입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그것에 맞는 운영체계를 새롭
게 만들며, 그것도 모자라서 모든 하드웨어를 새롭게 변경하다가, 우리의 뇌
의 기능과 같은 로봇을 만드는 것도 부족하여 결국 우리 자신이 자연이 되
어 버리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그러나 그것도 해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
시 원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뇌는 자연의 숨어있는 차원들을 재생할 수 있는 곳이 아
니다. 자연의 진정한 차원들을 알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힘의 근원적 입자
들과 함께 우리 자신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이란 우리의 언어
일 뿐이요 그것에 대한 표상들도 뇌의 표상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 독자들을 바로 계시의 개념으로 인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
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문명과 문화의 생활 속에서 각 자가 어떤 세계 
속에 홀려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나 자연 자체가 자체 밖에 객관적으로 자
신을 볼 수 있는 어떤 정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이런 허무주의가 자연의 진정한 문제
들을 한꺼번에 풀 수 있는 자리에 와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도 사람들은 최근 죠지 파커가 개발한 20:1로 공기와 가솔린
을 분사하여(fuel vapor technology) 시간당 224km로 달리는 공기자동차 혼
다엔진을 달고, 최근 일본에서 개발한 다리와 바퀴를 마음대로 교체하면서 
산악에도 올라가고, 도로도 달리면서(leg-wheeled hybrid mobile robot) 그
러나 바다 위에도 부상하여 달리면서 곧 바로 직선으로 하늘도 날 수 있는 
자동차 로봇을 개발하여 타고 싶어할 것이다. 

과학에 대한 욕구 끝도 없어

그러나 거기에도 인간적인 인자들과 그 속도는 여전히 근본 요소로 작용한
다. 우리는 걸어야 하고 아름답게 보기를 원한다. 그런 인간 인자들 안에 미
래 인간이 허무주의자들이 될 수 없는 근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