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관계에 대한 나의 이야기” _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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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에 대한 나의 이야기”

김명혁 ·강변교회 목사

인간은 본래부터 관계의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들
과 화목하고 자연과 화목하면서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죄
로 말미암아 이 삼중적 화목의 관계가 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이 깨어진 화목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셨다(고후 5:18,19). 

회복된 화목의 관계가 복음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거의 모든 교파와 계층의 사랑들과 화해를 이루
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그리고 화해를 심는 일들을 즐겁게 하
고 있다. 우리 사회 안에 화해와 상생을 심으려는 ‘상생’ 운동에도 참여하
고 있다. 내가 이렇게 화해에 관심을 가지고 화해를 힘쓰게 된 배경 이야기
를 하려고 한다. 
나는 본래 교제와 사귐을 폭넓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미국에 유학 가서 처음 몇 년 동안은 몇몇 한국 학생
들과만 교제하
며 지냈다. 그러다가 예일 대학교와 아이오와 대학에 가서 공
부하면서 교제와 사귐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인사를 먼저 건네고 그들에
게 교제의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내가 살고 있던 작은 방에 몇몇 
외국인 학생들이 모여서 즐거운 교제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때 나
는 남을 위해 돈을 쓰며 남을 대접하는 즐거움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오와에서는 내가 한인 유학생들을 불러모아 놓고 운동회도 하고 야외 소
풍도 했는데 너무 즐거웠다. 나는 그 때 이미 인생은 만남이고 나눔이고 기
쁨이란 사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학위와 연구를 모두 마치고 파사데나에 가서 8개월을 머물며 선교
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생후 2, 3 개월 밖에 되지 않는 
어린 아들 철원이가 로스안젤스 췰드런즈 호스피탈에서 뇌수술을 받게 되었
다. 수술을 하는 의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의 아기가 수술을 받은 후 장애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나는 그 때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 아
들 철원이가 수술 후 장애
아가 된다면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다’는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면서 기도했다. 며칠 
후 답이 나왔다. “나는 철원이가 장애아가 되어도 그를 사랑 할 수 있
다.” 
철원이가 나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고의 변화는 나에
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나는 그때까지 잘난 사람, 온전한 사람, 
건강한 사람, 예쁜 사람들을 주로 좋아했다.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
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네가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께서 똑같이 사랑하
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차별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 음성에 항복을 하
기 시작했다. 
1974년 8월 후암교회의 교육 목사로 부임한 다음 후암동 109번지의 제일 가
난한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애정을 쏟게 된 것도, 폐결핵으로 쓰러져 마산 
결핵요양소로 간 원의숙 학생을 비롯한 불치의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돌보
게 된 것도 모두 이와 같은 나의 시각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나의 시각의 변화는 그 후 나로 하여금 강자보다는 약자 편에 서게 했고, 부
유한 사람들보다는 불우한 사람들 편에 서게 했고, 여당보다는 야당 편에 

게 만들었다. 그래서 차츰 흑인 편에 서게 되었고, 북한 동포 편에 서게 되
었고, 조선족 편에 서게 되었고, 최근에는 모슬렘 편에도 서게 되었다. 참으
로 이상한 변화였다. 
이와 같은 나의 시각의 변화는 나로 하여금 여러 종류의 많은 사람들과 관계
를 원만하게 만들었다. 보수적인 사람들과는 물론 진보적인 사람들과의 관계
도 원만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타 종교인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되었다. 세
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에 대한 이해
와 포용의 폭이 점점 넓어졌다. 

이해와 포용의 관계 넓어져

정치와 문화와 종교가 다를지라도 그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고
귀한 인성과 영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들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결국 
화해의 폭이 점점 더 넓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