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미학에 담긴 구속의 의미
김영규 목사_뉴욕학술원, 남포교회 협동목사
매년 장마철과 여름철이 되면 인간이 남에게 주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
게 된다. 인간은 편리를 위해서 산을 깎고 도로를 만들며 자기 소유를 확대
하며 본래 인간에게 혼돈인 자연을 인간에게 좋은 모양으로 다시 개조하려
고 한다.
자연과 조화 이루는 개발되어야
이때 자연에 숨어 있는 에너지를 뽑아 쓰레기로 바꾸어 자연에게 되돌려 주
는 방식으로 소비하고 개발하며 인간적 문명을 다시 창조하는 시도에 대해
서 어떤 시간차를 두고 자연이 인간에게 돌려주는 방식은 스스로 엔트로피
를 감소하는 방향이다.
인간은 그것을 재난으로 생각하나 긴 시간으로 보면 스스로 저질은 인재로
생각할 것이다. 물만 보더라도 그 자체로 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
물은 없을 정도다. 보기에도 아름답고 만져도 그렇게 부드러운 것도 없으며
그 안에 푹 담겨 있어도 좋으며 우리에게 온갖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인
간이 그런 자연의 질서에 잘 순응하여 살지 못하고 그의 욕심과 허
영과 함께 인간 사이에 돈을 주고받는 식으로 지혜롭지 못하게 자연에게 돌
려 줄 때, 지구의 공기는 비정상적으로 비를 뿌리고 그로 인하여 많은 물을
먹은 산은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요 그 힘을 인간이 철골과 콘크리트로 쉽
게 막을 수 없게 된다.
자연 자체가 재난일 수 없다. 그것은 가장 근원적이고 먼 원인이신 하나님께
서 보다 낮은 여러 원인들을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하다. 칼빈의 말대로 하
나님의 선이나 진노 혹은 의가 명확히 비추어지는 거울에 불과하다. 그런 하
나님 앞에서 인간의 최초의 죄처럼 자연에 더위먹이고 그 다음 말을 할 줄
모르고 화낼 줄 모르는 그 자연과 인간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셈이다.
모두 아파트를 버리고 자연으로 들어가며 자동차를 폐기 처분하고 걸어 다니
라는 것이 아니다. 도로를 내더라도 지구 온난화로 비를 뿌리는 양과 속도
를 고려하여 자연의 순환을 역행하는 인간의 편리만큼 그런 비를 흡수할 수
있는 과학적 기술을 가지고 국토를 개발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엔트로
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우리에게 돌려주는
자연의 힘을 흡수할 말한 더 좋
은 자연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산을 깎든 굴을 파든 온 산이 그런 물을 먹었을 때 서로 지형으로 나누는 힘
을 지탱하는 힘을 계산하여 자연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예술과 문화, 문명
이 기반을 두고 있는 지향성 자체의 오류와 판명성의 오류를 절대화시키지
말고 자연 자체의 혼돈에 대해서 순응하면서 겸허한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
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을 때 더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이 첨단과
학을 지향하고 있다면 자연 자체는 인간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
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신 전혀 상상할 수 없었고 아직까지 그 신비를
풀 수 없는 첨단과학이다. 그 처음과 끝을 고스란히 보존해야 할 첨단과학이
다. 그것도 받는 자가 그 주는 자를 알 수 없도록 명하여 주신 선물이다.
주는 모든 자는 그런 하나님이 주시는 방식을 모방하여 주어야 할 것이지
만, 모든 지혜와 노력을 가지지 않으면 그렇게 줄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
의 한계이다. 인간이 줄 때는 반드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보는 가운
데 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줄 수 있는 방식이 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께만 감사하면서 주면 되는 것이다.
이유가 있어서 주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어서 주거나 자존심 때문에 주
는 모양이 나타나지 않으면 된다. 인간이 주는 모든 방식은 돈을 주고받는
방식이 그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인간의 마음이 선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어
야 할 것이지만, 인간은 스스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모범에 따
라 뼈를 깎는 노력으로 주지 않으면 그렇게 줄 수 없다.
그러면 악인에게도 그렇게 주어야 하는가를 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악인에게도 그렇게 주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주면, 주는 것이
다시 악으로 자신에게 돌아 올 때 너무나 억울할 수 있지만 입술을 깨물고
주라는 의미일 것이다. 악인이 악으로 살 수 있는 기간은 고작 60년이요 80
년이다.
칼빈의 유명한 말대로 지금의 죄들은 전에 범한 죄들에 대해 지불한 하나님
의 형벌들(peccata esse poenas quas Deus superioribus peccatis rependit)
이라고 한다면, 태초로부터 인류에게 전달된 진리를 거부한 그 역사만큼 그
역사들이 이미 형벌을 받은 것이요 악인들은 그 사는 동안 악을 행한 것이
바로 그
형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나 그리스도인의 부활신앙은 바로 그런 주는 자가 억
울하지 않다는 증거로서 주셨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을 주고
자 하여 줄 때도 죄인인 인간에게 그 주는 방식에 있어서 흠이 있게 마련이
다.
나누는 자가 진정한 자유 누려
오히려 자랑하지 않는 것, 겸손하는 것, 욕심을 버리며 남을 배려하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천상의 그리스도만을 닮아 가는 것 자체가 남에
게 주고 있는 가장 쉽고 가장 귀한 것을 주는 어떤 방식임을 더 많이 깨닫
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