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신|앙|강|좌| ‘스텔스 처치’를 통해 본 ‘참된 교회’에 대한 이해_장대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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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스 처치를 통해 본 참된 교회에 대한 이해

 

< 장대선 목사, 가마산교회 >

 

전도를 하다보면 가끔씩 듣게 되는 말이 바로 “나도 교회에 나갔었는데, 교회의 이런저런 문제가 싫어서 지금은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교회에 발을 디뎌보았을 만큼 흔한 것이 교회이지만 그와 반비례한 것이 바로 교회에 대한 신뢰도 같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회의 문제는 믿지 않는 자들도 다 아는 개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한 가지 중요한 것이 간과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교회를 비판하거나 개혁을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목소리들이 처음에는 분명하지만, 마치 늘어난 철길처럼 그것이 계속 진행될수록 또 다른 이탈이 발견되기 일쑤입니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회론은 대부분이 눈에 보이는 교회, 곧 조직교회에 대한 개념들입니다만, 교회론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보이지 않는 교회’ 곧 ‘보편의 교회’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제목에서의 ‘스텔스 처치’라는 선정적인 문구는 바로 보이지 않는 보편교회에 대한 흥미를 끌기위한 문구입니다.

흔히 보이지 않는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비가시적교회’에 대하여 이르기를 예배당 건물이 보이는 교회이고, 그 안에 모인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교회인데, 진정한 교회란 바로 모인 ‘우리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란 그처럼 건물이 아닌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 하나님의 택하심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인간의 눈이나 안목으로는 전적으로 구별해 낼 수가 없는 하나님 안에서의 오직 하나인 교회(the universal Church)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신앙으로서 고백할 때에 “거룩한 공회(혹은 교회)”라고 고백하는 문구가 바로 사람의 눈으로 구별할 수 없는,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오직 하나로 있는 그러한 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곧 사도신경을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교회들에서는 매 번 예배 때마다 보이지 않는 교회(보편교회)에 대한 신앙을 그처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진정한 신앙고백으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짧은 문구 안에 담긴 좀 더 긴 의미와 내용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 번 예배 때마다 신앙으로 고백하는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라는 문구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그처럼 고백하는 교회, 하나님 안에서 오직 하나인 감추어진 교회야말로 진정한 교회임을 우리는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지구상에 수 없이 많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모아졌고, 모아지고 있으며, 모아져야 하는 택함받은 자들의 모든 수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공회”라는 문구가 안에 담겨 있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교회’라는 단어 대신에 “공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보편적 교회에 대한 의미를 담는 것이며, 교회들이 흩어져 있을 지라도 항상 추구하는 것은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즘 흔히 들을 수 있는 말로는 교회의 일치를 추구한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치는 사도신경으로 예배 때마다 고백할 만큼 중요한 것이지만 W·C·C와 같은 단체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제도적인 연합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교회로서의 표지(sign)를 명백하고 분명하게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사실 W·C·C의 운동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교회로서의 표지를 조금씩 약화시키고 눈에 보이는 조직들의 일치와 화합을 추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들의 표지가 다른데 어떻게 일치와 화합이 가능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교회’라고 할 때, 무엇을 근거로 교회라고 부르느냐의 기준인데, 그것을 교회의 ‘표지(sign)’라고 합니다. 이 표지에 의해서 남아프리카에 있는 교회이거나 알라스카에 있는 교회이거나 상관이 없이 온 교회들이 다 하나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중요한 교회의 표지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보편적인 교회(가시적인 보편교회)는 때로는 덜 가시적이다. 그리고 그것의 지체들인 지교회는 그들 안에서 얼마나 순수하게 복음의 교리가 가르쳐 지고 수용되며 예식(성례)이 집행되고 공적예배가 수행되고 있느냐에 따라서 더 혹은 덜 순수하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조직교회가 진정한 교회인가 아닌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복음이 얼마나 순수한 교리로서 가르쳐 지고 있고 설교되고 있는가와, 성례(세례와 성찬)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순수하게 시행되며 예배 또한 얼마나 성경에 합당하게 수행되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조직된 교회가 아무리 크고 그럴듯한 것이라도, 이러한 기준에서 순수하지 못할 때에는 그것을 참된 의미의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교회 밖에는 구원에 없다”라고 외치는 교황의 외침을 뒤로하고 순수한 복음의 교리와 성례, 곧 로마 천주교의 일곱 성례가 아닌 두 가지 성례인 세례와 성찬을 집행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설립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도 로마 천주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로마 천주교회(성당)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보이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인 보편적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의미이며, 조직된 교회라도 비가시적이라 할 수 있는 교리의 순수성과 그에 근거한 합당한 성례의 집행여부에 따라서 더 가시적일 수도, 덜 가시적일 수도 있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이해가 없는 교회개혁은 그 취지와 다르게 껍데기만 개혁하는 것이 되기 쉬우며, 결국에는 진정으로 개혁한 것이 아니라 모양만 살짝 바꾼 개혁을 이루기 쉬운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순수성은 기본적으로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이라 할 수 있는 교리의 순수성에서 오게 됩니다. 이에 따라서 순수하고 바른 성례가 집행될 수 있는 것이고, 공적예배도 수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교리에 대한 이해와 그에 근거하는 개혁이 없이는 결코 진정한 개혁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개혁이 개신교회들에서 되지 않으므로 오늘날에는 개신교회보다 로마 천주교회가 더 경건하고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끝으로 눈에 보이는 교회는 온전히 순수할 수 없음도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회를 순수하게 모으실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르기를 “하늘아래 가장 순수한 교회도 혼합과 오류에 빠지기 쉽고, 어떤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會)가 될 만큼 변질되는 경우들이 있다”고 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지상에는 언제나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중세시대에 비록 부패한 로마 천주교회만이 유일한 교회였어도, 중세시대에는 순수한 교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언제나처럼 존재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교회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이제는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를 떠나서는 결코 교회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