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의미를 넘어_변세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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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의미를 넘어

변세권 목사_온유한교회

밀물처럼 몰려왔던 그 뜨거웠던 여름이 파란 하늘을 선보이며 썰물같이 빠져
나가기 시작한다. 별세신학으로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
던 이중표 목사가 얼마 전에 별세하였다. 

고인이 별세하기 위해 달려왔던 그 길은 고행도 아니고 탈진도 아닌 정말 행
복한 길이었다. 교단이 달라 별로 접촉할 기회가 없었지만, 평소 김명혁 교
수가 존경해 하는 것을 보고 몇번 세미나에서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자상
하면서도 넘칠 듯한 카리스마적인 인상은 아직도 내 마음에 향수로 남아있
다. 그가 젊어서 목회를 하는데 그를 괴롭히는 한 나이 많은 성도에 대한 일
화는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이중표 목사는 그 성도를 달래도 보고 얼러도 보고 으름장도 놔봤지만 정말 
사사건건 트집이었다. 그래서 이 목사는 ‘그 사람이 나가든지 내가 여기를 
떠나든지 양자 택일 하리라’ 마음먹고 비장한 각오로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아
버지, 그 사람을 다른 곳으로 보내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 버릇을 고칠 수 있도록 제게 능력을 주옵소서.” 
그러던 어느 날, 주께서 불현듯 이런 감동을 주셨다. 
“종아, 그 사람의 버릇을 고칠 작정이냐?” 
“기필코 고칠 작정입니다.” 
“그만두어라 내가 못 고치는 걸 네가 고쳐?” 
“주님, 왜 주님까지 그러십니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버릇을 고치고 안 고치고 간에 그 사람과 싸우지 말아라. 싸우
다가는 네 명에 못 죽는다.” 
그리고 주님께서 계속 물으셨다. 
“종아, 네가 의로워서 천국에 가느냐, 내 은혜로 가느냐?” 
“네, 주님의 은혜로 갑니다.” 
“그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도 내 은혜니 내버려 두어라. 나는 그 사람의 버
릇을 고치기보다 십자가를 지고 대신 피 흘려 죽었다. 사람의 죄됨을 다 고
치려했다면 나는 굳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아도 되었다. 그 사람은 못 고친
다. 도저히 못 고친다. 금식시켜도 안 된다. 종아리를 때려도 안 된다. 의로
워서 천국에 갈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줄 아느냐? 너 또한 내가 처음부
터 고쳐서 데리고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십자가
의 피로 덮어서 
의롭다고 할 뿐이다. 오직 은혜로 너를 데려갈 뿐이다.” 

이후 이 목사의 목회 방향이 달라졌다고 한다. 필자 역시 목회라고 조금 해
보니 이 말씀이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우리도 기억해야 한다. 목회는 사실
상 십자가에서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영적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일어나
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원
수는 우리가 극단에 치우쳐 살아가도록 속이고 있다. 즉 너무 자아에 빠져 
살아가거나, 자아를 너무 방치하며 살아가거나, 자기 남편이나 아내에게 너
무 몰입하여 살아가거나, 너무 무관심하게 살아가게 만든다. 

우리들은 칭찬을 받을 때나 수욕을 받을 때나, 약함에 있거나 강함에 있거
나, 자유 안에 있거나 감옥 안에 있거나, 행복 속에 있거나 불행 속에 있거
나, 시험 중에 있거나 시험을 통과했거나, 병든 때나 건강할 때나 피곤할 때
나, 불확실할 때나 확실할 때나 크게 다르거나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
이 십자가의 길이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음이란 평화롭고 초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론
의 대상과는 달리 때로는 불안과 두려
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날
마다 하나님의 때를 알고 새롭게 죽음을 의식하는 연습을 미리 해두어야 한
다. 매일 매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새롭게 살아가는 연습… 삶의 유한성을 겸
허하게 받아들이며 이기심과 탐심을 줄여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사람은 갖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누가 하나님의 시간을 멈
추거나 늘리거나 줄일 수 있을까? 아무도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없으며 자
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잠시 빌려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도 삶도 주님의 권한이기에 우리가 오늘 최선을 다했으면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기억
하고 하루하루 부끄러움이 없는 최선의 삶을 사는 동역자들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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