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북경칼럼> 관인(官認)과 창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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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북경의 살며 생각하며

관인(官認)과 창의성

김북경 총장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아직도 길거리에 내다붙인 학원광고 플래카드에는 “관인”이라는 단어가 앞
에 붙어 있다. 국가기관이나 공공단체에서 인정받은 학원이라는 뜻일 게다. 
그런데 ‘관청’, ‘관가’ 하면 우선 경직되고 피해야만 할 귀찮은 존재로 
떠오르는데 아직도 우리는 ‘관’을 믿는가 보다. 

국가의 역할은 사회의 악을 최대한 억제하는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런 의미에서 관의 역할은 소극적이고 국민의 창의성을 유발하는 데는 부정적
이다. 그래서 규제를 휘두르는 ‘관’은 창의성과 반비례의 함수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다. 즉 사회에 규제가 많을수록 국민의 창의성은 줄어든다. 그래
서 필자는 한국의 교육문제는 모든 공립학교를 사립학원화시키면 해결될 것
이라고 본다. 한 예로 최근 공산국가들이 저절로 폭삭 주저앉은 이유가 
‘관’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규제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관’과 자율을 통
한 창의성을 교회에 적용할 수 있을까? 위험한 착상이기
는 하지만 ‘창의성’의 이름으로 모험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교단이든 뚜렷한 신학을 가지고 있다. 그 교단(‘관’이라고 생각해 보
자)에 속하려면 그 교단의 신학에 동의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신학은 성경해
석의 집약이다. 성경은 변함없는 진리지만 성경은 또한 해석되어야 하는 책
이다. 성경해석은 각 시대와 문화속에서 변천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
이라고 생각된다(구원론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성경해석사와 역사 신학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필자는 갈릴레오의 지동설에 대한 종교재판을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런 종
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다. 교회와 신학교는 뗄 수 없는 관
계에 있다. 신학은 원래 교회에서 가르쳤는데 신학교육이 학문화, 그리고 전
문화가 되면서 교회와 신학교와의 갈등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갈등이 부
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것을 교회에 
적용하고 목회현장에서 실천하고 검증된 신앙의 열매를 신학교에 돌려준다. 
신학자들은 성경을 끊임없이 연구하되 교회에서 
검증된 신앙과 질문들을 신
중하게 경청한다. 이렇게 해서 교단신학은 발전한다. 

그렇지 않고 교단이 신학자들의 학문활동을 제한내지는 제어한다면 교단신학
은 화석화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이라는 학문을 할 필요가 없을 것
이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지만, 성경해석은 변한다는 것을 교회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절대적인 진리(예, 구원의 방법)를 제외하고
는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경계는 하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교단
과 신학교가 마음 문을 열어놓고 대화를 통해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겸손
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교단이 신학교를 감시하되 갈릴레오(법정밖에 나
와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한 이중성을 나타낸) 같은 신학자가 생겨
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단은 ‘관’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역할이 커질수
록 신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신학교의 발전은 큰 건물과 많은 학생만을 
뜻하지 않을진대 성경을 신앙의 양심안에서 창의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를 
배출하는 것이 진정한 신학교의 발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