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방 있습니까?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덕구 : (조용한 허밍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내가
연극 망쳐 놨어요. 그치만 어떻게 고짓말을 해요… 우 우리 집엔 빈 방이 있
걸랑요. 아주 좋은 방은 아니지만 요. 그건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근데 어떻
게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나라구 그래요. 난 정말 예수님이 우리 집에서 태어
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빈 방 있습니까?’는 1977년 12월호 가이드 포스트에 실린 실제 이야기로
1980년 성탄 무렵 일간신문 한 구석에 <월리의 성탄절>이라는 칼럼으로 소개
된 것을 보고 감동한 연출가 최종률씨에 의해 극화된 작품으로 극단 증언에
의해 해마다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성극입니다. 우리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
는 ‘덕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본대로라면 덕구는 ‘빈 방 없습니
다’ 라고 해야하지만 그러나 여관 장면에 이르자 빈 방을 애타게 찾는 요셉
과 만삭의 마리아를 보면서 극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던 덕구는 심한 갈등
끝에 대본과 달리 ‘빈 방 있습니다’ 라고 답하여 연극을 망치게 합니다. 여기
서 극중 인물인 덕구가 겪었던 내면의 세계를 통하여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들
의 현실세계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덕구의 정직에 대한 갈등입니다. 그 당시 여관주인의 입장이라면 충분
히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하라는 칙령
으로 재미를 보는 사람은 바로 여관집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관집 주인
은 숙박계의 사람의 숫자를 세고 방마다 돈 계산을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을
겁니다. 방 하나에 손님 몇씩이라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런 와중에 한 사람
도 아닌 그것도 해산할 날이 찬 허름한 부부를 받는 다는 것은 주인의 입장에
서 손해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때는 마치 합승에 보탬이 되지 않는 손님을 거
절하는 택시기사처럼 빈방이 없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 처세였을 겁니다. 그러
나 덕구는 거짓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기 전에 하나님께
서 주신 자신의 양심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을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일 것입니다. 올
한 해도 돌이켜 보면 양심을 지키느
라 주님을 따르느라 손해 본 사건들이, 가난해진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그 정직한 모습을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덕구의 순진에 대한 갈등입니다. 좋은 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수님
을 모시고 싶은 덕구의 마음은 그 당시 왕궁에 있는 권력자들이나 제사장과
서기관 등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의 마음과 다르게 보입니다. 성경을 보
면 메시야의 탄생 소식이 사회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다니다가 결국 양치
기로 전락한 사람들에게 먼저 전하여진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서 외적권세를 누리는 자들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순진하게 메시야를 기
다리는 자들을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우리는 무언가 큰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할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일 겁니다. 주님은 화려한 장식이나 웅
장한 문화시설을 찾으시지 않고 마굿간과 같은 순전한 곳을 찾으실 겁니다.
고사리 손을 모아서 율동을 하는 유치부 아이들에게, 구석진 주방에서 손수
빚은 떡만두국을 끓여
대는 권사님의 손길 위에, 그리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노엘을 외치는 새벽송의 발걸음 위에 주님이 찾아오실 겁니다.
자신만이 중요하고 손해보는 것 피해 받는 것을 싫어하는 요즘, 명품 신드롬
이나 ‘얼짱’과 같은 세태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덕구의 대사를 다시 한 번 기
억해야 합니다. ‘그치만 어떻게 고짓말을 해요… 아주 좋은 방은 아니지만
요, 그건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말로만 부르짖는 똑똑함보다 세속에 오염
되지 않은 바보스러운 행동이 넘치는 성탄절을 만들어 봅시다. 그늘지고 소
외 받은 마음의 빈 방 구석까지, 영혼의 어두운 방까지 그리스도의 빛이 임하
기를 서로 축복합시다.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