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은 목사의 칼뱅주의 비판에 대한 반론_황대우 목사

0
29

신광은 목사의 칼뱅주의 비판에 대한 반론

 

< 황대우 목사, 고신대학교 강사, 부산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 >

 

“칼빈주의 5대 교리는 ‘국제적 회의’통해 작성된 교리”

 

 

<메가처치 논박>을 쓴 저자 신광은 목사가 뉴스앤조이에 칼뱅주의(이하 칼빈주의)의 논리적 구조에 대한 비판의 글을 게재했다.

 

칼빈주의에 대한 신목사의 비판을 요약하면 “칼뱅주의 자체의 성격” 즉 칼빈주의 교리의 특성은 “제국주의적 인식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신목사의 판단에 따르면 제국주의적 인식론의 산물인 칼빈주의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고 정교한 논리 체계”이고 “논리적으로 완벽한 체계”이지만 실효성이 없다.

이 글은 객관적인 비판의 수준을 넘어 상당히 주관적인 비아냥거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1. 신광은 목사가 말하는 논리 형식으로 보자면 칼빈주의 교리는 결코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고 정교한 논리 체계”가 아니다.

 

이미 신목사 자신이 지적한 것처럼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정론에는 ‘신비’라는 커다란 구멍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목사의 말대로 이 신비는 ‘구멍’이다. 그가 보기에 칼빈주의자들은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그 구멍으로 쉽게 빠져나가버린다. 그래서 아마도 그는 이 신비의 요소까지 갖춘 칼빈주의가 정말 대단한 ‘논리 체계’라고 느꼈을 것이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차원에서 판단한다면 그와 같은 엄청난 비논리적 구멍이 존재하는 칼빈주의 교리를 결코 “논리적으로 완벽한 체계”로 간주할 수 없다. 오히려 예정론은 너무나도 비논리적이어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것을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고 정교한 논리 체계”라고 말하는 신목사의 주장은 도대체 어떤 논리 형식에 근거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논리적인 것으로만 따진다면 신목사의 비판 논리가 칼빈주의 논리 체계보다 훨씬 더 “일관되고 정교”하다.

 

2.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로 알려져 있는 내용은 칼빈주의 교리를 체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17세기 초 항론파들이 자신들의 교리적 입장을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한 5개 조항의 문서에 대한 답변서이며 그것도 몇몇 소수에 의해 작성된 교리문이 아니라 유럽 여러 국가들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국제적인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작성된 교리이다.

 

즉 칼빈주의 5대 교리로 알려져 있는 내용은, 비록 어느 정도 일관되고 정교한 것일지는 몰라도, 결코 칼빈주의 교리를 논리적으로 정교한 체계를 만들 목적으로 작성된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다만 항변파(remonstranten)의 5대 교리와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적 반박문일 뿐이다. 여기서 remonstranten(레몬스트란떤)이란 당시 ‘항의자들’, 혹은 ‘항변자들’을 의미하는데, 알미니우스(Arminius) 자신을 포함하여 그의 추종자들인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을 일컫는 공식용어이다.

 

3. 신 목사의 논리를 기독교의 다른 교리에 한번 적용해보자.

 

만일 논리적인 예정론이 신비라는 구멍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면 기독교 구원 교리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삼위일체론이나 그리스도의 양성론도 역시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신비라는 구멍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삼위일체 교리, 즉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논리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교리, 즉 예수 그리스도가 무한한 신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일까? 삼위일체론이나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려야 하는가?

 

마치는 말

 

신광은 목사는 자신의 글을 “제3자의 입장에서 칼뱅주의가 갖는 논리적 구조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이라고 전제하는데 결코 그의 입장은 제3자의 입장이 아니다. 제3자의 입장이란 논리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3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자 하는 일말의 의지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논리주의자를 제외한다면 그의 입장은 누가 봐도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신광은 목사 자신은 부인할지 모르지만 그가 서 있는 위치는 확실히 반예정론자의 입장이다. 그리고 그의 반예정론은 그가 논리적으로 완벽한 체계라고 비판하는 칼빈주의보다 훨씬 더 논리적 일관성과 완벽성을 추구하는 논리주의의 결과라는 사실도 첨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