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앙이 주는 교훈
< 장석진 목사, 광주월산교회 >
재앙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 볼 수 있어야
‘지신 가미나리 가지 오야지’(地震·雷·火事·親父)는 일본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무서워하는 네 가지다. 각각 지진, 벼락, 화재, 아버지를 뜻한다.
앞의 셋은 재해인데 비해 네 번째로 등장하는 오야지는 좀 뜬금 없다. 가부장시대 주인공이 슬쩍 끼어 붙은 것일까. 오야지가 야마지(山風), 즉 태풍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렇게 되면 넷 모두가 재해를 가리킨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재해, 특히 자연재해는 두려운 존재였다. 자연재해가 그들의 삶 중심을 좌우했으며 이를 거스를 경우 치러야 할 몫이 적지 않았던 탓이다. 지금까지 일본인들에게 지진은 으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이번 지진의 재앙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사라지게 했다. 땀이 밴 인간의 성취도, 문명의 빛나는 진전도 자연의 거대한 힘에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검은 파도에 쓸린 배와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내동댕이쳐졌고 건물들은 종잇장처럼 부서졌다. 지난 3월 11일 금요일 오후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대지진의 후폭풍은 참혹했다.
‘지신 가미나리 가지 오야지’란 표현은 이제 ‘다이지신 쓰나미 겐파쓰’(大地震·津波·原發)로 바꿔야 할 것 같다(겐파쓰는 원자력 발전소의 일본식 줄임말). 사실 대지진에 이어 제트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들이닥친 쓰나미는 인명피해의 가장 큰 직접 원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가공할 파괴력으로 악마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9000여 명이 숨지고 수십만 명이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방사능 낙진은 2000㎞ 떨어진 북유럽, 중부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대지진과 쓰나미가 몰고 온 또 하나의 재앙, 후쿠시마(福島) 원전 폭발은 충격적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에 이어 3호기도 폭발했다. 두 차례 폭발 과정에서 200명에 가까운 이들이 방사능에 피폭됐고, 패닉 상태에 빠진 주민 21만 명이 앞 다퉈 탈출의 길에 올랐다. 지진-원전 연쇄 재난에 대한 일본인들의 방사능 오염 공포는 기존의 두려운 존재들을 웃도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대비해야 할 문제는 어떤 선진 문명으로도 대응하기 힘든 환경의 쓰나미, 금융의 쓰나미, 정보의 쓰나미, 테러의 쓰나미이다. 그리고 현대 문명의 임계점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생명의 구제이다. 생명을 구제하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고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생명애), 토포필리아(topophilia, 장소애), 그리고 네오필리아(neophilia, 창조애)와 같은 이웃을 향한 선한 사마리아가 되는 사랑뿐이다.
이때 우리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고 했던 일본과 한국이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생명을 자본으로 한 진정한 글로벌리즘이 검은 파도를 이기는 우리의 블루 오션이다.
일본에 있는 어떤 선교사로부터 온 편지의 일부이다.
“후꾸시마의 원자력 발전소는 숨겨진 위협으로 인간들이 손을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칼이 있음을 보여 주시는 주님의 강력한 의지와도 같습니다. 이민족은 선하고 순종적인 것 같지만 바로의 불신이 무지와 완고로 점철되듯이 이 백성들도 항상 그러합니다. 주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의지해야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이웃과의 연대뿐만 아니라, 재앙을 넘어 보다 본질적인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야 한다. 창조주 앞에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 일본의 아픔이 가슴 깊이 저며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