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암 신학 강좌가 남긴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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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신학 강좌가 남긴 숙제

 

한국교회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본격적인 유입은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알음알음 꾸준히 전파되었지만, 수면에 부상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개혁주의를 전혀 모르던 뭇사람들의 뇌리에 분명히 각인되고 크게 알려진 것은 최근 수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 개혁주의는 백일도 안 된 갓난아기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곧 개혁주의 관련 도서들이 촉매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사실이다.

작금 많은 사람들이 개혁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개혁주의에 어울리는 집을 짓기 위해 공들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스스로 둘러친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안타깝지만 우리나라 개혁주의자들 중에는 개혁주의를 개혁교회에서 몸으로 체득한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 신학자와 목회자, 성도들 모두 다를 바 없다. 유학 시절 개혁교회에 몇 년 간 출석한 사람들은 있지만,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그 토양에서 자라 개혁주의를 신앙과 삶으로 경험한 신자들, 그런 사람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구성원을 이루고, 여러 세대에 걸쳐 형성된 개혁교회는 아예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개혁주의에 대해 누군가 말하길 진정한 개혁주의가 아니라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토착화된 기독교가 그 본질적인 색깔을 잃은 것처럼 개혁주의는 그저 구호화 된, 자기 자신만의 개혁주의라고도 말한다. 개혁주의에 대한 이해와 추구하는 바가 잘못 되었다는 말이다.

개혁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마치 유행을 따르듯, 그 본류와는 전혀 다름에도 단어만 차용해서 자신은 개혁주의자라고 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혹은 개혁주의의 지향점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목말라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데 있지만, 그것을 외면한 채 신학 노름만 하고 있다. 철학자들과 같이 한 가지 주제만 깊게 파내려 가며 지적인 만족에 흡족해 하고 있다. 수맥 위에서가 아니라 바위 위에서 무의미한 곡괭이질만 하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무엇이 개혁주의고,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바가 무언인지 상기해야 한다. 더불어 개혁주의를 삶으로 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지적 노름을 그치고 삶을 살기 위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신학과 신앙, 삶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정암 강좌는 이 점에서 우리에게 큰 숙제를 남겨 주었다. 곧 신학과 신앙, 삶의 균형과 조화를 우리 교회들이 이뤄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