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不通), 소통(疏通), 쾌통(快通)_김성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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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不通), 소통(疏通), 쾌통(快通) 

김성렬 목사_충남노회장, 소망동산교회

지금 우리 사회는 국가적으로도 소통불통(疏通不通)으로 진통이 심하고, 개
인 간에도 소통불통이라는 동맥경화증 때문에 후유증이 심하다.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왠지 평화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화로움이 보이지 않고 껄
끄러운 대립만 보이는 듯하다. 

조화대신 대립만 늘고 있어

국민 한 사람의 입장에서 불안하고 편치가 않다. 그래서인지 서로 간에 옳
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지적의 소리는 많고, 뜯어 고치겠다고 다짐하
고 나서는 이들도 많지만 그들의 모습에도 믿음이 가기보다는 뭔가 일을 크
게 터트릴 것만 같이 보인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하겠지만 고치겠다고 나서
는 사람들도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불안을 가중시키는 것이 문제
다.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민중의 힘이 하나로 뭉치는 것이 특징이다. 각종 발달한 네트웍라인을 통
해 
재빠르게 의견이 교환이 되고 뜻이 모아지면서, 이 뜻이 곧바로 힘이 되어 
강한 주장으로 돌변한다. 이렇게 다수의 의견이 모아지고 다수의 결정이 반
영되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 뜻에 기대를 걸고 바라보아야 하는
데 현실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민주주의가 틀어지면 중우(衆愚)정치가 된
다. 어리석은 민중의 자율정치가 시작된다. 민중의 어리석은 자율정치는 혼
란을 가중시킨다. 다수의 잘못된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가지고 올 
수도 있다. 중우정치는 무지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지나친 자신
감과 자만감으로부터도 온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 사회의 분위기
는 다수의 의견, 소수의 의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내 뜻이 옳다”
라는 이데올로기로 사생결단을 하려는 것 같다. 여기서 큰 충돌이 끊이지 않
는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사람들은 자유를 부르짖는다. 인권을 부르짖는다. 그러면서 자기 인권을 존
중받기 위해 다른 많은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본다. 그러면서 자유
를 외치고 인권을 외치
니 진정성이 없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은 나
만의 경솔한 생각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리 좋은 정치, 정책이라고 하여도 모두를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없다. 
때문에 적절하고 적당한 선택이 필요하고 결정이 필요하다. 이때 필요한 것
이 원칙이다. 원칙은 약속된 기준이며 모두가 승복해야 할 척도이다. 이것
이 안 지켜지면 소통이 불통이 된다. 
원칙에 따라 대(大)를 위해 희생하는 소(小)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져야 하
고, 대를 위한 소의 적당한 희생은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양편에게 
이러한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원칙이 없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은 쉽
지가 않다. 
원칙은 우리에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게 하기도 하고 자신의 손실을 인정하게
도 한다. 혹 원칙에 근거한 결정이 객관적 관점에서 문제 해결을 이루어 내
지 못한다면 원칙을 바꾸어야 필요성을 갖는 것이지 원칙 무용론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에는 법이 있다. 법에 따라 법이 시행된다. 하지만 모든 법안과 법의 시
행이 옳은 것이 아니다. 때문에 헌법기관이 있다. 법 자체에 대한 불신과 법
의 시행에 있어서의 오류가 있다면 헌법
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원할 수 있
다. 
때에 따라서는 헌법 자체에도 시대에 맞지 않는 항목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에는 공동체의 일원인 국민들의 투표로 개헌을 결정한다. 때문에 사회의 
약속, 규범 그리고 법이 있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주장
도 하고 승복도 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이 부분이 부족한 듯
싶다. 원칙을 자기 입맛에 맞추어 생각하려는 사회에서의 혼란과 충돌은 쉽
게 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목회자들 사이의 소통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건강하고 건
전하며 바른 소통은 이루어지고 있는지,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환
한 미소를 지으며 동역자임을 다짐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다른 생각으로 불통
의 벽이 상존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우리 안에도 불통 조짐 보여

우리 교단 안에도 불통의 조짐들이 나타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불통을 소통
케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나아가 서로 쾌통하는 사이가 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