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냐? 윤리냐?
남웅기 목사_바로선교회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후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성경은 그 목적을 마귀에게
시험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시험관인 마귀를 성경에서 유혹자(tempter)
로 표현했지만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이란 잘못된 길로 이끄는 ‘유혹’
의 의미가 아니라 합격여부를 판가름 짓는 평가의 의미가 더 많다고 생각합
니다.
마귀의 시험은 언제나 계속돼
무슨 과목이냐고요? 메시아로 오셨으니 메시아의 자격 여부 아니겠습니까?
이 시험 때문에 예수께서 준비하신 것은 40일 금식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
님의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과제라 하겠습니다.
메시아란 인류를 위해 보냄 받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을 말합니다. 이스라
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그런 지도자를 찾으며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자칭 메시아가 너무 많아 진성 메시아를 드러내는 기준이 필요했습
니다. 그래서 40일간 굶주린 예수님은 마귀와 대면해야만 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
라.”
우리는 여기서 마귀의 첫 질문에 주목코자 합니다. 마귀가 돌 하나를 들고
예수께 나와 ‘이 돌로 한번 떡을 만들어 보아라’ 하며 예수님의 능력 자체
를 시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굳이 십자가를 진다고 누가 알아 주냐? 너
바보 아냐? 굶주린 이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게 급선무 아니냐? 너, 배고파
보니 알겠지? 땅에 널린 게 돌인데 이 백성들을 두고 볼 것이냐?” 하는 의
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귀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 시험에서 지면
예수는 가짜 메시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께 엄하게 책망 받는 베
드로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그 당시 백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굶주림이었습니다. 먹는 것을 해결해주면
최고의 지도자였습니다. 예수께서 5병 2어의 역사를 일으켰을 때 ‘예수를
왕으로 삼자’는 백성들의 집단적 반응은 좋은 예가 됩니다.
이러한 절체 절명의 순간에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대처했습니다. 누구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에 마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진리 앞에 주저앉는 마귀의 모습이라 하겠
습니다. 예수께서 세 관문을 넘어서자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 수종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진성 메시아로서의 승인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현장은 비극의 에덴동산입니다. 마귀는 거기서도 먹는 문제
로 시험했습니다.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했어도, 아무리 하나님 말씀 듣
는데 손해처럼 느껴졌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했
습니다. 당시 아담 하와에게 중요한 것은 먹는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였
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과거 에덴동산과 유대광야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오늘 현
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입니다. 마귀가 말했던 떡은 서양의 빵을 말합니다.
한글성경 번역과정에서 떡으로 표현했지만 사실 정확한 의미라면 ‘밥’이
맞습니다.
여기서 밥이 돈을 말한다면 말씀은 가치를 말합니다. 밥이 실리를 말한다면
말씀은 명분을 말합니다. 밥이 욕망을 말한다면 말씀은 사랑을 말합니다. 밥
이 소유를 말한다면 말씀은 나눔을 말합니
다. 오늘날로 치면 밥이 경제를 말
한다면 말씀은 진실을 말합니다.
밥을 얻기 위해선 거짓말도 하고, 원칙과 상식도 짓밟아야만 합니다. 말씀대
로 살면 곧 망할 것 같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마귀의 시험
입니다.
마귀가 먹는 것으로 시험할 때 아담은 하늘의 뜻을 쫓아야했습니다. 아담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아담이 잃었던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다
시 회복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이 생명을 던진 십자가였고, 십자가는 밥보
다 더 확실한 살림의 방법이 되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이 우선 되어야
밥보다는 윤리가 우선입니다. 교회와 성도에게 있어 원칙과 상식, 말씀 순종
만큼 확실한 윤리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