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쓰는 물건인고?_박재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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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박재훈 목사
작동교회, 목회자최저생활대책위원회 위원

휴대폰(핸드폰이란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니므로 이하 휴대폰으로 표기하기로 
하자)은 작지만 만만히 볼 수 없는 물건이다. 우리의 생활 양식을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은 물건이다. 사실 출현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엄
청난 파급 속도로 우리의 삶에 파고 들어왔다. 이제는 한시라도 없어서는 아
니 될 생활의 필수품이요 문명의 이기라 하겠다. 

손마다 들고 있는 휴대폰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좋은 점과 나쁜 점, 긍정적이고 밝은 면이 있는
가 하면 동시에 부정적이며 역기능적 그리고 어두운 그늘진 면도 있다. 휴대
폰도 예외는 아니다. 그 편리함과 좋은 점은 이루 말하기 어렵다. 그 성능
과 기능도 정말 다양하고 나날이 눈부시게 진화하여 그 작은 기계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깊은 산 속에서 조난을 당하여 위험에 처했
을 때 사람을 구조하는 도구로 쓰이는 등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편
리하
고 유용한지 모른다. 
필자가 못내 아쉬워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 휴대폰의 등장으로 우리의 감
정 문화가 많이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아직 우리가 척박하고 핍절
한 삶을 이어가던 무렵, 신중현이 작곡하고 김추자라는 가수가 불러서 크게 
히트했던 “커피 한 잔”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가사는 이렇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대 오기를 기다려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 8분이 지나고 9분이 오네, 1분만 지나면 나는 가요.” 오
늘날 같으면 이 노래가 통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누구 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호사스런 상태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바로 휴대폰 때문이다.
섬 지방의 할머니는 물론이요 어린 아이마저도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작금
의 시대에 그 당시와 같은 안타까움이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약속을 하고 
기다리다 바로 휴대폰으로 상대방의 위치 확인에 들어간다. “지금 어디
야?” “나 전철 탔어, 10분이면 도착해.” 곧 도착할 것을 확인했기에 막
상 만나도 가슴 설레는 기쁨은 별로 없다. 또 헤어져도 굳이 만나자는 약속

n도 무의미하다. 휴대폰 버튼 몇 번 누르면 바로 통화가 되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만남의 연속이라 할 수 있고 이 만남이란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휴대폰은 언제 그리고 어디서나 상대방과 대화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늘 만나고 있는 상태를 지속해 주고 있다. 
늘 만남의 상태를 유지해 주기 때문에 이제는 당연히 헤어짐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헤어짐이 없으니 만남의 기쁨도 사라졌다. 또한 약속의 기다림도 없고, 옛날
에 흔히 볼 수 있었던 바람맞기, 바람맞히기도 이제는 없어졌다. 또 문자 메
시지 문화가 발달되어 많은 이들의 중요한 통신 수단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제껏 필자가 휴대폰에 대하여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결론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할 때 그 물건은 구별된 물건이 된다. 예를 들어 피아노가 있다고 하
자. 이것이 나이트 클럽에서 세속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로 사용될 수도 
있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악기로 쓰일 때도 있다.
필자는 총회산하 “목회자 최저 생활 대책위원
회” 위원으로 있다. 본 위원
회는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내고, 교단 신문을 통하여 가난한 목회자들을 돕
기 위한 ARS모금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그러나 아직 그 취지나 
홍보의 부족 탓인지 모금 실적이 저조하여 가난한 동역자들에게 많은 도움
을 드리지 못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어려운 목회자들 안타까워

얼마 전에도 위원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숙의하였지만 우리의 능
력의 부족함을 절감하였다. 이제 주의 이름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하건
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그 사랑스런 휴대폰으로 한번씩 060-700-8291 번호
를 눌러 주시기 바란다.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얻을 것이라
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마 10:41). 고넬료의 구제와 선행을 기억하셨
던 하나님이시다(행 10:4). 

광야의 소리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
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는 바울
의 권고는 자칫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방종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능
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권고
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는 말씀과 같은 조건에
서 서로 다른 면을 강조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권고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는 권고는 결코 다르지 않다. 기독교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들은 법
률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강요되거나 수행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행위
가 계율이나 도덕적 규정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그와 같은 율법에서 성도들을 해방시키셨다. 때문에 자유는 주어
진 선물이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일 자체가 이미 받은 은혜의 표시이다. 그러
나 이 자유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 하는 사실
로 입증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9-10)는 바울의 말처럼 선한 일을 성취함으로써 진
정한 자유의 삶을 표출하는 것이 성도들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
라’고 권고하고 있다. ‘육체’란 부도덕, 방탕, 술취함, 증오, 이기심, 질
투의 근원이다. 이와 같은 일들을 하기 위해 성도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대신에 성도들은 선한 일, 즉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기 위해 부
르심을 받았다. 
때문에 사랑의 봉사는 자유의 적절한 행위인 셈이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
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됨으로써 얻은 자유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라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출 9:1). 그렇다면 이미 종살이를 면제받고
서도 아직도 육체의 종살이를 하고 있다면 그 얼마나 비참한 상태가 아니겠
는가? 사랑,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는 진리임을 명심해
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