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예수 그리스도 _최성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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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예수 그리스도 

최성대(동산교회 담임목사) 

어느 가정에 심방한 적이 있다. 집사님이 “저에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
리스도의 칭호는 평강의 왕”(사 7:6)이라고 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
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는 말씀처럼 땅에 거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가 되신다. 
평강이란 말은 전쟁이 없는 그 이상의 조화로운 상태를 뜻한다. 역사의 뒤
안길을 보면 평화는 깨어졌고, 우리는 다툼이 계속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
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엡 2:14). 다윗 왕은 예루살렘의 성
전을 지어 봉헌하려고 했지만 성전을 지을 수 없었던 이유는 피를 너무나 많
이 흘렸기 때문이다(대상 22:8). 그리스도는 트러블 메이커로 오신 분이 아니
라 피스메이커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의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평화의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

n다. 엡2:14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
을 허시고.” 여기 “막힌 담”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막힌 담을 가리킨다. 유대
인들은 자신의 특권을 주장한 나머지 이방인들을 무시했다. 그러나 예수를 경
배하러 온 박사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다. 

평화의 예수는 가정에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인가. 평화의 그리스도를 가정의 주인으로 모셔드린 
가정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이다. 평화의 예수를 가정에 주인으로 모셔드린 가
정은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는 가정이 될 것이다. 가
정에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다. 경제력, 체력, 지력, 담력, 그러나 무엇보다 
평화의 주님이 필요하다. 평화의 주님이 빠져버리면 가정은 모든 것을 잃어버
리고 만다. 

평화의 예수는 교회 안에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기 위해 오셨다. 에베소 
교회는 겉모양으로 볼 때 통일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
의 내면은 겉모양과는 판이하게 달
랐다. 에베소 교회는 내면적으로 볼 때에 
적지 않은 갈등과 불협화음 있었던 교회였다. 교회 안의 갈등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의 주님이
시기 때문이다. 교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평강과 평안과 평화이
다. 교회의 분열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왜
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평안의 줄이기 때문
이다. 

평화의 예수는 남자와 여자의 막힌 담을 허물어버리기 위해서 오셨다. 구
약시대의 예루살렘의 성전의 구조를 보면 성전 미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
게 되어있다. 미문 안으로 들어가면 남자의 뜰과 여자의 뜰이 구별되어 있
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남녀차별의 역사가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남녀의 차
별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으신 분은 바로 평화의 주님이시다(갈 3:28). 예수 
그리스도는 남녀간에 가로막힌 큰 장벽을 허물고 평화의 다리를 놓으셨다.

평화의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오셨다(엡 
2:16). 인간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된 전쟁과 원수의 상태에 있
다. 하나님
과의 분리된 상태는 불안과 죽음과 어두움이 지배하는 상태이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불화의 상태를 초래한다. 하나님과의 전쟁의 상태를 화목의 상태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신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도성인신)의 사
건이다. 

어두운 삶의 현장에 그리스도는 평강의 태양이시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
촌 구석구석에 복음의 빛이 가려진 응달진 곳이 너무나 많다. 아직도 응달지
고 얼어붙은 동토의 땅이 너무나 많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
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
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이 세상에 의인만 산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죄에 대하여는 전쟁을 선포하지만, 죄인에 대
하여는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 이 두 가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십
자가와 부활의 권능밖에 없다. 

평화의 예수는 민족과 민족 간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오셨다. 1944
년 겨울 세계 제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군이 파리 근교에 있는 독일군의 
패잔병을 수색하고 있었다. 때는 성탄절 이브 저녁이였
다. 연합군이 총뿌리
를 겨누고 수색을 하는 중에 독일군의 패잔병이 함께 모여있는 곳을 발견하
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독일군이 촛
불을 켜놓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두움에 묻힌밤”의 캐롤 송을 부르고 있
었다. 

연합군도 이 광경을 보고 무기를 다 내려놓고 함께 캐롤 송을 부르고 함
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를 마친 후에 연합군은 독일 패잔병들에게 연
합군이 주둔해있는 곳을 피해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연합군과 독일 패잔병
간에 평화가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평화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
재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에 범죄가 늘어가고, 가정이 깨져 가는 원인은 무
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나님과 이웃
과 담이 막히고, 가정과 개인과의 담이 막혀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안정은 점점 상실하게 된다. 이런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약속을 지키는 자”의 각성 운동을 일으키시고 있다. 막힌 담을 허물어
버려야 한다. 평화의 그리스도 안에서 막힌 담을 허물어버
리고 서로 교통하
는 복을 건설해야 한다. “솰롬 우베르카”- ‘평강의 복’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