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산물의 ‘신학’을 거부한다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일과 관계있다. 이 말은 신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가감 없는 바른 진술과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실과 삶에 대한 진술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영원이 시간과 맞닿는 자리에 신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없고 시대의 제약을 일부러 걷어찰 필요도 없다. 오히려 시대의 문제를 부둥켜안고 시대와 더불어 몸부림쳐야 한다.
이것은 신학으로 하여금 시대성의 제약에 따르는 겸손과 함께 시대적 과제를 목표로 하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도록 도전한다. 하지만 신학이 가지는 시대성의 한계와 시대성이라는 목표는 자칫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선포하는 불변하는 진리를 왜곡하며 변개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신학이 시대의 아들이 되는 순간이다.
이것은 영원에 잇대어 오늘을 살아가야 할 신학이 시대의 이름으로 영원을 도발하는 것이다. 그 순간, 시대에 대한 적실성이라는 명분으로 성경이 포함하는 진리는 재해석되고 변질된다.
“신학이 당신의 신앙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는 어느 광고 카피의 문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명심해야 할 권고로 남아 있다.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난도질하며 시대정신으로 불변하는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게다가 신학의 시대적 과제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신학이 진리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신학이 우리 시대의 언명(言明)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또한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과 현실을 부둥켜안아야 하지만 그것이 영원한 진리를 파괴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시대성의 이름으로 콘텍스트가 텍스트를 뒤엎을 수는 없다. 현대 신학의 해석학적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칫 절대 불변의 진리는 사라지고 해석자의 해석만 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상대의 자리를 넘어 절대를 넘본다. 내용은 사라지고 해석만 난무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대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이다.
영원을 담아내지 못하는 신학은 의미가 없고 진리를 변개하는 신학은 백해무익하다. 이런 신학은 단지 시대의 맹아(盲啞)일 뿐이다. 올바른 신학만이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지만 잘못된 신학은 교회와 영혼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