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이름의 함정을 배격하자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에 대하여 사회의 정의를 외칠 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 그것은 사회의 정의 그 자체에 머물고 만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사회 정의 그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의 의로 오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불신자들의 정의 개념과 신자들의 정의 개념을 마땅히 구분해야 한다. 성령으로부터 난 선행이 아니라면 사회 정의 역시 일반은총적인 의미에서의 제한적인 가치만 있을 뿐이며, 구원과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가 사회 정의를 외치며 나아갈 때 일반은총적 요소인 사회 정의에 만족하고 이를 수긍하는 데만 머문다면 이것은 복음에 나타난 또 다른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정작 모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잘 아는 것처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의 ‘의’다. 이 ‘믿음의 의’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반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는 필연적으로 자기 의(義)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자기 의는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막는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사회 정의 개념은 십자가를 통한 개개인의 실존적 변화와, 변화된 실존의 총체적 삶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먼저는 십자가를 통한 실존의 변화이며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회 정의인 것이다. 곧 중생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이 먼저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삶이 그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의 사회 정의는 일반은총적 수준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임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따르는 삶이며, 나아가 개인의 경건을 넘어 일상 속에서 표출되는 제자도와 사회적 책임으로 고백되기 마련이다.
개인의 실존적 변화를 전제로 하는 총체적 복음은 이런 의미에서 사회복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진정한 의미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의 곧 믿음의 의에 기초를 두지만, 일반적인 사회복음은 믿음의 의가 아닌 율법의 의에 그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사회복음에서 말하는 복음은 사회적 정의와 평화일 뿐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고 정의와 평화가 흐르는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시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는 신자와 불신자의 사회 정의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또한 일반은총의 한계에 대한 지적도 없다. 단지 신자와 불신자는 함께 하나의 복음을 추구하고 결국에는 십자가가 없는 유토피아를 지향할 뿐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