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을 더 자주 행하도록 하자
예배에 있어서 말씀 선포와 성만찬은 함께 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시작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양육되고 자라간다. 그리고 성만찬으로 그 말씀의 실천적 고백이 나타난다.
초대교회의 공예배는 말씀 선포와 성만찬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중세 로마교회에서 예배가 제사 중심 미사로 변질되었고,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예배는 개혁의 의지에는 미치지 못하는 설교 중심의 예배가 되고 말았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교회는 공제설과 상징설과 영적임재설을 서로 주장하다가 성만찬의 핵심인 성만찬의 시행에 있어서 실패하고 만 것이다. 특히 츠빙글리는 당시 사라졌던 교회에서의 말씀 선포 회복을 위한 선두주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으나, 반면 성만찬을 연중 4회로 제한하는 연약함을 드러내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교회 개혁에 있어서 말씀 선포에 대한 개혁은 이루었으나 성만찬의 회복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성만찬 회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성만찬의 시행 횟수인데, 츠빙글리가 제안했던 횟수 제한에 대한 개혁은 그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이는 제네바 시의회가 15년 앞서 개혁의 뿌리를 내린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를 외치는 교회들은 성만찬의 본래 모습을 찾고 개혁함에 있어서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만찬은 교회 모습을 드러내는 표지 중 하나이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반드시 주일 공예배에서 성만찬을 시행하여야 한다. 그것도 자주 시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공예배를 떠난 모임에서 갖는 성만찬 시행은 옳은 일이 아니다. 교회의 공예배를 벗어난 모임에서의 성만찬 행위는 그 어떤 모임이라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1537년 제네바 시의회가 칼빈에게 초안을 맡겼던 “제네바 시의 교회직과 예배에 관한 논문”에서 칼빈은 매주일 성만찬이 거행되어야 한다면서 “이것이 줄 수 있는 위안과 교회에서 자주 성찬식을 베풂으로써 모든 면에서 일어날 영적인 풍성함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금도 성만찬의 시행 횟수를 제한함으로써 교회가 누릴 영적인 풍성함을 놓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개혁정신으로 돌아가 성만찬의 횟수를 늘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