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 봄 _ 이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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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 감상>

봄은 생각보다 더디 온다. 긴 호흡으로 인내하는 자에게만 봄의 교향악은 의미 깊게 울린다. 더디지만 올 것은 온다. 오랜 수고와 산전수전 끝에 이렇게 마침내 돌아온다. 언젠가 눈부신 봄을 껴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서로에게 외치자.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편집자

  • 이성부 시인(李盛夫, 1942~2012) _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우리들의 양식〉 당선. 〈이성부 시집〉(1969), 〈우리들의 양식〉(1974), 〈전야〉(1981) 등의 시집이 있다. 그는 서정적, 역동적, 의지적인 시로 민초들의 생명력과 서민의 정한을 잘 담아낸 절창의 시인으로 평가 받는다. 대표작으로는 <봄><벼><귀향> 등. 현대문학상(1969), 한국문학작가상(1977), 대산문학상(2001)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