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예술의 위치에 대한 크리스천의 이해 _ 안석현 강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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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예술의 위치에 대한 크리스천의 이해

 

<안석현 강도사 _ 송탄제일교회>

 

학부 시절 미술을 전공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판화 수업을 하는데, 교수님께서 훌륭한 작품을 내놓기 위해서 예술가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언급하셨다.

“마치 본인이 창조주란 생각으로 까불 줄 알아야 돼! 그래야 작품이 나와!”

크리스천으로서 교수님이 사용하신 표현이 적잖이 거슬렸다. 그리고 이런 불편함은 미대 재학 시절 내내 필자를 따라다녔다. 어려서부터 나름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릴 들어왔기에 자연스럽게 미술을 전공하기로 결정하고, 이제 그림을 더 잘 그려 봐야겠다 생각해서 미대에 진학한 것인데, 정작 미대에서는 그림 잘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교수님의 표현대로 미술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이 창조주가 되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내는 행위, 즉 창조 행위 그 자체였다. 이 사실에 심경이 불편했던 것이다. 무언가를 미적으로 표현해내는 행위를 좋아했던 것일 뿐, 창조주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기에 미대를 다니던 내내 많은 고민을 했다.

졸업한 이후에도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미대에서 배운 미술 행위가 크리스천으로서 결코 즐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술이란 게 무척 허무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왜곡

이렇게 미술을 창조 행위처럼 여기는 경향이 과연 어디서 나타났는가를 생각해 본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개념미술’(槪念美術)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개념미술을 이렇게 정의한다.

개념 미술은 현대미술에서 종래의 예술 지향적 형태에서 벗어나 반(反)미술적 제작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다. 감상할만한 작품을 만든다는 지금까지의 예술가 의식을 버리고 작품 그 자체보다도 제작의 의사나 과정이야말로 예술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미술이란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거나, 혹은 그 개성을 살려서 재현해내는 영역이었다. 간혹 동양권이나 이집트 같은 곳에서 사물 자체의 정신이나 의미를 이미지로 담아내려는 시도가 있긴 했지만, 그 또한 피사체의 외형을 크게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진기가 발명된 이래로 미술은 단순한 피사체의 묘사 수준에서 벗어나야 했다. 사진기가 기존 미술의 자리를 대체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화가들의 미술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술로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피사체에서 화가 자신으로 그 관심이 이동하였다. 그렇게 해서 화가의 관점과 사상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투영되기 시작했다. 나름의 피사체가 화면에 담겨 있긴 하지만, 그 피사체 또한 화가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피치 못한 형태의 왜곡과 훼손이 발생한다. 화가가 창조주가 되었으니, 이제 마음대로 표현해도 되기 때문이다. 이제 화가를 화가라고 부르는 게 어색해졌다. 그림을 그림이라 부르는 게 어색해졌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란 화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기법은 표현의 수단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예술가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실물과 똑같은 이미지가 필요하면 사진을 찍으면 된다. 움직임을 담아내고 싶다면 영상매체를 이용하면 된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자신의 몸을 성형하면서 그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작품화하는 작가도 있다. 참으로 기괴하다. 그 외에도 음악, 연극, 퍼포먼스 등 다른 장르와의 퓨전(Fusion)이 이뤄지기도 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것에 한계가 있으니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보는 거다. 하지만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는 법이다(전 1:9). 이제 미술에서 드로잉(drawing)의 의미는 단순히 ‘그리다’가 아니다. 그래서 미술이란 개념을 사용하는 게 어색하다. 모두가 다 예술이란 범주 안에서 경계가 허물어지고 무분별할 정도로 자유로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미술가들의 마인드(mind)의 변화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젠 ‘미’(美)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특징이 미술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고집 센 창조주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인간 특유의 죄성이 ‘미’란 이름으로 둔갑하여 작품의 메인 테마(Main Theme)를 차지하였다. 스스로 우상이 되었고, 또 우상을 만들어 낸다.

 

뒤바뀐 위치

어느 날 조직신학자인 스프로울(R.C. Sproul)의 강의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신학’은 다른 모든 학문 분야들보다 상위 분야로서 우위를 차지한다. 미술이란 학문은 어디에 위치해있을까? 그저 세상의 수많은 학문들 중 하나일 뿐일 것이다. 신학이 미술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우위에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영역들 위에 군림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학의 위치가 흔들리고 말았다. 다른 학문들과 비등비등한 위치도 못되고, 그보다 더 아래로 곤두박질쳐버린 것이다. 이제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어 버렸다. 신학이 미개한 학문으로 취급당한다. 아마도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이 생겨난 것일 거다. 그와 반대로 다른 수많은 분야들은 신학의 영향을 벗어나 종교의 수준까지 쭉 뻗어 올라간다. 미술을 비롯한 예술 분야 또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예술 분야는 더 이상 신학의 시녀로서의 역할을 거부한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창조주의 반열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신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오랫동안 출석하던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주일날 찬양대 지휘자로 섬기던 교인 한 분이 예배 시간에 장로님이 공적으로 기도하시는 내용에 불만을 표한 일이 있었다. 장로님은 하나님께서 찬양대의 찬양을 받아달라는 내용으로 기도하였는데, 지휘자였던 그 분은 그 기도 내용이 영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찬양대의 노래를 하나님한테 드리는 식으로 여길 수 있느냐!”하면서 결국 교회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 지휘자에게 있어서 찬양대의 찬양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한 공연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위치와 예술의 위치가 서로 뒤바뀐 사람들의 생각의 단면을 보여준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는 교인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원래의 위치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예술의 역할과 위치를 바르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서의 예술이다. 우리가 가진 창조성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계시의존사색을 통한 추구여야하지, 하나님을 벗어나서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용하는 성격의 것일 수 없다(삿 21:25). 그러한 추구는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것과 다름없다(창 3:5).

그렇다고 해서 사진기 발명 이전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미술의 후퇴가 될 것이다. 제 역할을 찾아야한다는 것을 오해해서 흔히 말하는 이발소 그림이나, 화장실의 장식용 그림으로 퇴행하자는 말이 결코 아니다. 기존 현대 미술의 기준에서도 미학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결코 밀리지 않는 수준 높은 작품이 나와야 하는 게 당연하다. 단지 우리가 이 일을 계시의존사색이라는 기반 위에서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술의 원래 제자리, 신학의 시녀로서의 위치가 세속 예술계 안에서 수준이 떨어지는 것일 수 없다.

우리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노래했던 시편 기자의 자세를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성경적 가치에 기초한 예술품의 수준이 어찌 세상의 예술품에 밀릴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