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단상
소나무는 거기까지다
<김대진 목사 _ 하늘누리교회>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넉넉한 나무가 되고 싶다
옛 선비들은 소나무를 받들었다. 가을이 되어도 변색하지 않고, 그 추운 동절기에도 푸르름을 유지한다. 그래서 어떤 풍파에도 올곧음을 지켜내는 절개의 상징으로 소나무의 이미지를 가져다 쓰곤 했다. 사육신 중 성삼문은 죽음의 장에 끌려가며 시조를 읊었는데 그 중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는 그의 절개를 표현한 유명한 경구가 되었다.
그러나 소나무는 사실, 홀로 푸르를 뿐이다. 주위에 힘이 되지 않는다. 소나무는 매우 이기적이다. 혼자만 살려 한다. 소나무 주위에는 소나무만 있다. 다른 풀은 자라지 못한다. 소나무에서 나오는 독성 물질이 다른 식물의 생장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일명 타감작용(allelopathy)이다.
일반적으로 식물의 뿌리 부분에서는 다른 식물들의 생장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성분들이 많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사리류나 키가 작은 식물들이 다른 키 큰 나무들에 가려서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밑에서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나무는 그것마저도 아까운지 막아 버린다. 자기만 위하고 자신만 세운다. 독야청청이다.
그래서 소나무는 거기까지다. 자신은 지켰을지 모르겠지만 남을 위한 자리를 내어 주지는 못한다. 소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 주관이 분명하고 꽤 유명하다. 멀리서도 툭 튀어나와 보인다. 그런데 거기 까지다.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가 없다. 자신만을 위해 사람을 쓴다. 다른 사람이 자라지 못하게 막아 버리고 홀로 우뚝 서 있으니 멀리서도 툭 튀어나와 보일 수밖에. 일상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아픈 일이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이는 마음 좋은 넉넉한 나무가 보고 싶다. 그런 나무들과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언덕이 보고 싶다. 그런 나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