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 병, 죄, 치료
< 김성진 목사, 늘소망교회 >
그리스도를 신뢰하자. 문제의 처방과 치료를 그가 하신다
얼마 전 목이 자꾸 잠겨서 거담제라도 먹으려고 이비인후과에 갔었다. 의사가 내시경 사진을 보여 주면서 후두에 뭔가 있다고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한다. 사진을 보니 성대에 볼록하게 돌기가 솟아 있었다. 간단히 생각했다가 예기치 않은 말을 듣고 놀라서 대학병원 두경부암센터로 달려갔다. 진료를 기다리면서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니 내 목 상태가 영락없는 후두암이었다. 순간 인생을 정리(?)하고 있는데 의사가 왔다. 암은 아니란다. 그렇지만 몇 개월 약을 강하게 써보고 폴립이 줄어들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다.
목이 쉬는 증상 하나 가지고 가볍게도 생각 했다가 기겁도 했다가, 혼자 여러 가지를 했다. 겉으로 나타난 증상만 가지고 판단하거나 조치해서는 안 된다. 원인이 되는 정확한 병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병을 다스려야 한다.
요즈음 사회에 정의와 선행에 대해 강조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높아지는 인상을 받는다. 불의와 비행에 대한 성토의 소리가 뜨겁다. 토론도 많고 구호도 차고 넘친다. 교회도 그런 차원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좋은 소리도 좋지만 너무 피상적이지 않나 싶다. 잘하자, 착하게 살자, 나쁜 짓 하지 말자고 외치면 인간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가? 증상만 잡으려고 하면 되는 게 아니다. 원인되는 병을 고쳐야 한다.
성경은 세상 문제의 원인을 죄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성령으로 푸신다. 심오하고 복잡하게 푼다. 율법을 주고 바른 말만 하지 않으신다. 우리 속에 퍼진 죄를 다루신다. 사람을 새롭게 하고 뿌리를 고치신다. 당장 증상만 덮으려고 세상에 마취제나 진통제를 뿌리지 않으시는 이유다. 맘에 들지 않는 모습이 주변에 널려 있다. 하나님은 뭐하시나 싶은 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래도 좀 더 깊이 생각하자. 죄를 생각하자.
지금은 성(聖)과 속(俗)이 분리되어 있다. 세속주의에 물든 때문이다. 가정과 사회의 문제를 다루지만 신앙과 경건에 연결하지 못한다. 부부싸움, 학교폭력, 소외 계층, 이념 대립, 갑질 문제 등이 교회와 예배, 기도, 찬양과 관계가 없다. 또한 교회로 모이고 예배를 드리며 기도는 하는데 가정과 사회생활에 연결하지 못하는 것도 우리의 과제다.
어느덧 따로 따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로 통해야 한다. 약한 사람을 돕고 옳은 길을 가자고 하며 악한 사람을 지탄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주의 나라를 바라는가, 나를 버리고 주를 사랑하는가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의사라고 하셨다. 그리고 병든 자들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원인이 병인 줄 모르고 자기가 마음먹고 행동만 고치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를 찾지 않는다. 혹 병이 문제인 줄 알아도 그 병을 자기가 고치는 것이 아니다. 의사를 찾아 그에게 자신을 맡겨야 한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자.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처방과 치료를 그가 하신다. 약을 먹으라 하시면 약을 먹고, 수술하자 하시면 수술대 위에 눕자. 그가 우리 죄를 깨끗케 하시리니.
병을 고치면 당연히 증상도 나아져야 한다. 그런데 당장 증상이 없어지지 않을 수 도 있다. 치료하는 동안 통증이 더하기도 한다. 수술을 하게 되면 당분간 원래 아팠던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병을 치료했다면 결과적으로 증상이 호전되어야 한다. 교회가 죄 문제를 알게 되었고 전능하신 의사를 모셨다면 어느 시점에서는 개선된 모습을 보여야 맞다. 그 증거가 없어서 세상이 외면하고 자가 처방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우리가 고민하고 기도해야할 문제다.
배가 아픈데 ‘빨간 약’을 바를까? 아니면 파스를 붙여야겠나? 결국 문제의 원인은 죄이고, 그 죄를 해결해야만 제대로 증상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거기서 후퇴하는 것은 갈 길을 멀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