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뜨락
인생의 꽃망울을 다시 피게 하신 하나님!
< 김재열 목사, 뉴욕센트럴교회 >
“피지 못한 꽃망울 이제 피게 해 주세요.
평생 주님을 위해 향기를 토하리이다”
나는 믿음이 전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이때에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성극을 보러 간 것이 내 생애 교회에 처음 간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에 서너 번 주일학교에 나갔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가서 채플도 참석하고 성경도 배웠지만 깜깜하게 지냈으나 돌이켜보면 감사한 일이었다. 고교 시절에 반 친구 중에 목사의 아들이 있어서 고등부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설교 시간에는 늘 졸았지만 모든 행사에는 꼬박꼬박 참여하였다. 그렇지만 신앙의 체험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고3 때 폐결핵 진단을 받으면서 삶의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을 구출하시는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8세 어린 아들을 죽을지 살지 모르는 천리 길 마산 요양소에 맡겨 두고 서울로 떠나시던 그 옛날 어머니의 뒷모습을 그리면서 몇 해 전에 이런 글을 써보았다.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예전에 한국에서는 4월 7일이 보건의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건강을 강조하는 그날. 유난히 사랑했던 18세 큰 아들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중증의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국립 마산요양소에 입원 허가를 받고 엄마와 아들이 그 곳에 도착한 것은 5월 8일 바로 어머니날이었다.
아들은 그날 엄마의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 한 송이 대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피멍을 새겼던 날이다. 밀대처럼 키만 크고 뼈가 앙상한 당신의 큰아들을 떼어 놓고 떠나야 했던 우리 엄마! 유난히도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를 많이 했다며 튼튼하게만 자라기를 일심으로 바랐는데 아이구! 이 자식이 이제 사람 구실을 하겠는가?
아들 대신 피를 토하듯 절규하던 어머니의 통곡이 50년이 다 지났는데도 어머니날만 되면 여지없이 이 늙은 아들의 귓가를 때린다.
요양소에는 전국에서 모인 중증 환자 250여 명이 있었다. 매일 4~5명이 죽어 나갔다. 죽음이 나에게도 가까이 와 있었다. 참 많이 절망했다. 기운이 없어 피를 토할 힘도 없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기보다는 스스로 사라지는 길을 생각했다. 병동 맞은편 깊은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키 1m 80cm에 몸무게 47kg이었으니 눈만 감으면 곧 주검이었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숨이 차올랐다. 인적이 닿지 않는 곳. 거기서 며칠만 누워 곡기를 끊으면 더 이상 힘이 빠져 조용히 생이 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움푹 파인 구덩이에 누웠다. 해는 졌고 밤새들이 울었다. 처음 듣는 짐승 소리도 들렸다. 체념은 또 다른 평안을 주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덮었다. 이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땅속에서 차가운 물기가 허약한 육체를 뚫고 솟아올랐다. 온몸이 떨려 왔다. 도리어 몽롱했던 정신이 쌩쌩해졌다.
도저히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비겁자가 되었다. 병실로 돌아와 몇날 며칠을 정신없이 지냈다. 또 다시 죽음의 길을 찾아 나섰다. 바닷가 높은 절벽 위에 섰다. 밑을 내려다본다. 시커먼 바다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바다는 수영을 잘하는 날 받아드리지 못할 것 같았다. 천길 같은 낭떠러지 벼랑에 온 몸이 뒤틀린 작은 소나무가 나를 향하여 소리치고 있었다. “날 봐! 난 이 벼랑에 붙어서도 살아 있잖아! 생명은 죽음보다 강한 법! 맘대로 못 죽어!” 난 또 한 번 비겁자가 되었다. “그래! 생명이 부질없지만 때로는 죽음보다 강해! 죽는 셈치고 살자! 살아보자!”
얼마의 날들이 지났다. 옆 침대의 몇 살 많은 동아대학생 형의 기침 소리가 잠 못 이루는 내 귀에 들려왔다. 앗! 저 기침… 각혈이 분명해… 본능적으로 일어나 그릇을 받쳐 들고 옆 침대로 건너갔다. 그 형은 사시나무 떨듯 두려워하고 있었다. “뱉어! 뱉어야 해! 토해 내지 않으면 호흡기에 쌓인 피들이 굳어서 숨이 멎는 것이 폐결핵이야.” 그 형은 토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토해냈다.
역겨운 피 냄새를 피해 보려고 읽을거리를 찾았다. ‘박군의 심정’이라는 그림 전도지가 있었다. 어둡고 불행한 박군이 행복한 얼굴로 바뀌는 그림들이었다. 박군의 맘속에는 온갖 추잡하고 사납고 더러운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맘 밖에서 예수님의 빛이 박군의 마음에 비칠 때에 결국 모든 육신의 더러운 죄악들이 쫓겨나갔다. 그리고 예수님이 박군의 중심에 앉으셨다. 그의 얼굴은 스마일로 바뀌어 있었다. ‘당신의 삶이 행복하길 원한다면 이 기도문을 읽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난 진지한 마음으로 기도문을 읽어 나갔다.
아주 간결하고 짧은 기도문 하나가 마치 연막탄 같았다. 순간적으로 찬란한 구름이 나를 감쌌다. 내가 몸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살아 있음이 이렇게도 찬란한 줄 미처 몰랐다. 그 시간 이후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확신이 가냘픈 가슴 속에 가득 차올랐다. 꼬집어 표현할 수 없이 기뻤고 감사했다. 머리맡의 꽃병에 꽂힌 꽃망울을 보며 기도했다. “주님! 저 피지 못한 꽃망울 이제 피게 해 주세요. 피게 하시면 평생 주님을 위해 향기를 토하리이다!”
이젠 죽어도 살아도 전혀 두렴 없는 커다란 확신에 사로 잡혔다. 6개월 만에 요양소를 떠난 그날 이후 50년의 삶 속에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다.
주님은 살게 하시고 죽게도 하신다. 거름더미에서 들어 귀족의 자리에도 앉히시는 분이시다. 꽃망울도 다시 터뜨리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
* 김재열 목사(합신 4회)는 30여 년 간 캐나다 토론토를 거쳐 미국 뉴욕에서 이민 목회 중이다. 최근 동역자들과 2만 6천 평의 비전 랜드를 준비, 전인적 섬김의 프로젝트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시작했고 현재 씨드선교회 USA 이사장으로 130여 선교사 가정을 섬기며 뉴욕실버선교회를 설립했다. 저서로는 「예수, 내 삶의 내비게이션, 생명의말씀사, 2014」이 있다. 본고는 필자의 회고록의 첫 부분을 요약 기고한 것이다. _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