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신앙>
다시 황금률을 생각한다
– 어느 콜센터 직원의 자살 소식을 듣고
< 민현필 목사, 산울교회 부목사 >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최근 전주의 한 콜센터에서 일하던 고3 졸업을 앞둔 여고생이 저수지에 몸을 던져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미 50여 일이 지난 일이지만 CBS의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인터뷰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고객들의 온갖 불평과 욕설도 부족해 콜센터 관리자로부터 실적을 강요받는 심리적 압박감까지 더해져 고3 여학생은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 학생이 스스로 생을 포기할 즈음 내가 섬기던 부서 선생님도 고3 졸업을 코앞에 두고 사회 생활 경험을 해 보겠다고 콜센터에 취직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가 오길래 ‘무슨 일 있냐고‘ 안부를 물었다. 그랬더니 콜센터 일이 너무 ‘힘들고 무서워서‘ 한 달 만에 일을 그만 뒀다고 했다. 그 얘기를 하면서 내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서 나도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다 큰 장정이지만 아직은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순수한 선생님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극한의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이 두 가지 일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감정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는지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나 자신도 내 이익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콜센터 직원들에게 모질게 굴었던 적이 많기 때문이다. 고객인 내 입장에서 그분들은 인격을 가진 개인이기 이전에 거대한 이동통신사를 대표하는 주체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나도 이런 구차한 모습 보이는 내 자신이 싫지만 서민들을 우롱하는 대기업들의 횡포는 더 싫고, 게다가 주머니 사정이 뻔한 사역자의 삶을 살다 보니 때때로 마음이 너무 작아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춰 보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내 동생이고 조카이고 우리 부서 선생님일 수도 있는 그런 분들이다. 아주 가끔은 불평을 막 쏟아 놓고서 ‘혹시 그분이 우리 교회 청년이거나 성도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진짜 내 모습이다. 동시에 스마트폰 너머 익명의 주체를 향한 내 감정 표현의 방식 또한 내 본 모습일 수 있다. 아무리 상거래의 관계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고3 여학생은 한 달에 100만원도 채 받지 못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내가 막 짜증내고 감정을 쏟아 부었던 사람들도 결국 고압적인 조직 문화의 피해자이고 약자들인 셈이다.
어쨌든 그 인터뷰를 들으면서 내가 상처 줬던 아파트 수위실 아저씨(이분들도 간혹 완장이라도 찬 것처럼 주민들에게 불친절할 때도 종종 있지 않던가), 이름 모를 콜센터 직원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분들이 자기 직무를 어떻게 감당하든 그분들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내 몫이고 내 인격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너무 빡빡하게 살지 말아야겠다. ‘감정수업’의 저자인 철학자 강신주씨의 지적처럼 ‘을끼리의 폭력‘에 내 자신을 내모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역지사지의 공감적 성찰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주님께서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시지 않았던가. 칼빈은 이웃 사랑의 삶이란 다름 아닌 이 황금률을 실천하는 삶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황금률의 핵심이 정의(justice)와 깊은 상관이 있는 ‘형평(equity)의 원리’라고 보았고, 이것이야말로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을 실천하는 원리임을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분노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속에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웃 사랑의 정신이 담겨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