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과연 전문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는 이들의 전유물인가?
“신학은 과연 전문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는 이들의 전유물인가?”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신학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우선 대답부터 하면,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학을 해야 하고, 사실 신학을 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 말 속의 신학은 전문적 신학은 아니다. 전문적 의미로 신학을 하는 이들은 극히 적다.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신학한다”(theologieren, doing theology)고 표현한다. 그렇게 전문적으로 신학하는 일은 평생 그 일에 종사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사명으로 맡겨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신학을 하는 것만이 신학하는 것은 아니다. 비전문적으로 신학하는 일도 있고, 오히려 더 많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신학하는 일의 본래적 의미이다. 전문적으로 신학하는 이들의 사명은 이런 비전문적 신학 작업을 돕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신학함의 의미를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생각해보려 한다.
첫째, 모든 목회자는 “신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전문적 의미의 신학자는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만일 목회자가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그 가르침을 회중들에게 그들의 수준에 맡도록 전달하며,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여 가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목회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참된 목회자는 날마다 기도하면서 성경을 공부하여 바르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한 성경의 뜻을 오늘의 상황과 구체적인 성도들의 삶에 적용하여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전해 주며 성도들과 함께 성경에서 발견한 참된 교회의 모습이 이 땅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도록 기도하며 애쓰는 사람이다. 바로 이것이 신학하는 일이다. 이 일에 힘쓰지 않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아무리 많은 사람을 모으고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처럼 보여도 참된 목회자가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삯꾼 목자”일 뿐이다.
둘째, 성도는 “신학하는 사람들”이다. 앞서의 참된 목회자와 함께 교회의 회원들도 자연스럽게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면서 그 말씀의 뜻을 잘 파악해 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러니 이들 모두가 다 넓은 의미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바른 목회자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 그들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 “성도(聖徒)들”, 즉 “거룩한 무리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이며 성경을 바로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신학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로마가톨릭에서는 전문적인 성직자들 이외의 사람들을 전문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뜻에서 “평신도”(平信徒, layman, 오늘날은 layperson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 모든 것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변혁시키려 했던 개혁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제요, 성직자들이라면서 상호 목회의 원칙을 강조하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각기 은사를 받은 대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 즉 신학하는 사람이 되었고 교회 공동체의 모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 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성경을 계속 공부하며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공동체, 곧 신학하는 공동체가 된 것이다.
셋째, 그러면 성도들은 과연 어떻게 신학할 것인가?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닌 우리들은 먼저 우리들의 한도 내에서 목회자들의 인도를 따라 성경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열심히 기도하면서, 시간을 내어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해야 한다. 부족하지만 이 일을 위해 노력하다 보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을 전체적으로 깨닫게 된다(the whole counsel of God).
그로부터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는 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느끼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결단하고 사는 일을 향해 나아가게 돼야 한다. 그것이 참으로 복되게 사는 일인 신학을 하는 일이다. 이 작업은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고, 죽어서 “하늘”(heaven)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 뒤에는 우리 모두가 더 온전한 신학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일, 즉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는 일”을 이미 이 땅에서 시작했다. 이를 박윤선 목사는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이라고 표현했다.
한국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런 의미의 “계시의존사색”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가 이렇게 바르게 신학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할 때 지금 한국 교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일을 얼마나 빨리 시작하느냐, 얼마나 진지하게 하느냐, 그리고 특히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