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고 계십니까?_안두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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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고 계십니까?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채워가는 지혜자들이 되기를”’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이 말은 김 훈 씨가 쓴 <남한산성>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소설가 김 훈 씨가 쓴 <남한산성>이라는 책을 보면 1636년 12월 14일 인조는 청나라의 침략을 피해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그곳에 머무는 47일은 가장 혹독하고, 치욕스러운 겨울이었습니다.

   한겨울이라 가진 것도, 먹을 것도 변변치 못합니다. 그렇다고 나가서 싸울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고립무원의 성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 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는 결단에 대한 고통이 깊어만 갑니다. 결국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고 맙니다.

   저자는 인조 임금이 굴복한 역사적 현장을 기록하면서 이 치욕을 잃지 말자고 독자들에게 도전을 합니다. 이 <남한산성>을 읽고 나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이제 결실의 계절입니다. 잎이 무성했던 여름이 가고 낙엽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누구나 1년을 되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런 계절의 흐름 속에 우리 인생도 언젠가 삶의 끝자락에 다다를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해보면 의미 있게 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에 찾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힘주시고, 능력 주셨을 때에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의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영국 격언에 “해가 비추는 동안, 건초를 말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지금 해야 합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 할 날이 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는 자들이 되셔서 오늘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채워가는 지혜자들이 되어야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씀하십니다. 곡식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씨앗이 먼저 썩어져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썩어지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온 몸을 십자가에 던지셨습니다.

   그 죽음은 사탄의 저주와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죄와 사망과 사탄의 모든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삼일 만에 무덤을 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어야 사는 것, 죽어서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다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피어납니다.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아와 하수구에서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만 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찬 서리가 내리는 겨울 산꼭대기에서도, 소나무가 사철나무 되어 올곧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을 보았습니까? 모두가 조건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 그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가 있습니다. 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합니다.

인생의 결실을 생각하는, 추수를 생각하는 거두어드림을 생각하는 이 계절에 무엇을 결실할 수가 있을까요? 이 가을 – 열매 맺는 계절에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지, 나의 상태, 현재 나의 삶의 상태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내 앞에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기회 앞에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직도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 아직도 삶의 기회가 계속되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라는 이 글귀가 나의 마음에 맴도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다시 한 번 나를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