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세속정치에 관하여

0
60

세속정치에 관하여

4월 총선을 앞두고 주변에서 여러 불미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온다. 신학교 어느 동기 단체 메신저 채팅방에서 정치 견해가 좌우로 갈려 심한 언쟁이 오갔고, 심지어 어느 노회에서는 좌우 논쟁 끝에 회원 사이에 얼굴을 크게 붉히는 일도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세속정치에 관해 현재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불일치의 아주 작은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설날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가족과 친지가 모인 자리에서도 정치토론이 단골손님처럼 고개를 쳐들고 여러 주장이 들끓다가 막판에는 언성이 높아지고 앞으로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처럼 의가 상하는 일까지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세속정치는 무엇인가? 가장 나쁜 세속정치는 정치가 개인이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정치이다.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한 폭군적 독재정권이 대표적인 예이다. 나쁜 세속정치는 정치 집단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패거리 정치로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편이면 틀려도 손들어주고, 남의 편이면 옳아도 공격하는 것이다. 좋은 세속정치는 진정으로 국민과 백성의 안녕을 위해 힘쓰는 정치이다. 과연 이런 정치가 역사상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스운 것은 세속정치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 언제나 국민을 들먹거리며 백성을 위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장 좋은 세속정치는 가능할까?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정치 수장이 되거나 기독교 신자가 다수를 이루는 정권이 되면 어떨까? 정말 안 된 말이지만, 이런 경우에도 절대적인 기대를 걸기는 어렵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칼뱅주의 드보라”라는 별명을 얻었던 쟌느 달브레에게서 어느 정도 양호한 표본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심지어 유럽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칼뱅의 제네바도 이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들도 세속정치의 틀에서 완전히 나올 수 없었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는 신앙의 양심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속정치는 어디까지나 세속정치일 뿐이다. 세속정치는 정치원리와 정치이념을 따라 궁극적으로 세속의 목적을 이룬다. 세속정치란 입으로 아무리 국민을 위한다고 말해도 결국은 세속적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것이 전부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정치는 복음과는 언제나 거리가 멀다. 선지자들로부터 사도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속정치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신자는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 정치적 성향을 가질 수 있지만 세속정치의 어떤 형태든지 극단적으로 무조건 추종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금물이다. 신자는 모든 세속정치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비판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 좌건 우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 있으면 수용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거절한다. 진정한 기독교 신자라면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기 때문이다(골 3:1-2). 그러므로 우리는 “좌”의 사람도 아니고 “우”의 사람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저 위”를 찾는 사람이다. 세속정치에 함몰된 사람은 땅의 사람이지 하늘의 사람이 아니며, 세상의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자가 세속정치에 비판적이면서도 세상에 그대로 머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세상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와 구속사의 관계로 설명된다. 역사는 구속사를 이루는 데 필요한 틀이다. 종국에는 구속사만 남고 역사는 제거된다. 마치 건물을 세우기 위해 외면에 공사를 돕는 시스템 비계(공사보조용 임시가설물)를 아무리 멋지게 설치했어도 건물이 완성되면 가차 없이 떼어내는 것과 같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세속정치에 목숨을 걸듯이 연연하는 것은 마치 건물 소유주가 건물보다 비계에 연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신자는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복음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때로는 순교까지 감내하면서 세상에 남는다.

인간은 모든 견해를 종합할 수 없고 단지 파편적이며 편파적 시각을 가질 뿐이다. 따라서 세속정치를 논할 때, 자기의 견해가 이미 틀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마음을 품고 양보적인 자세로 발언해야 한다. 자기의 주장을 절대적이며 완전한 것으로 고집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