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프랑수와 1세
역사 없이는 종교도 없다. 종교는 역사와 단절된 것이 아니다. 종교는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성장하고 결실한다. 위그노도 마찬가지이다. 위그노는 가상도 아니며 허구도 아니다. 위그노는 프랑스 역사의 일부이다. 프랑스의 역사 없이는 위그노의 신앙도 없다. 이런 점에서 위그노는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격랑의 연속이기에, 위그노도 격랑의 시대 한복판에서 등장하였다.
프랑스 위그노가 역사에서 가장 먼저 만난 국왕은 프랑수와1세이다. 프랑수와는 본래 계보를 따지면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조금 먼 거리에 있었는데, 선왕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예상을 깨고 왕위에 오르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프랑수와는 두 살 연상의 누이 마르그리뜨의 짙은 영향 아래 인문주의 소양을 기르면서 상당한 지식과 다양한 예능을 갖추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후기 인문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뿐 아니라 널리 장려하여 르네상스 정신을 구현하는 군주로 칭송을 받았다. 이 때문에 프랑수와는 독일 북부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에도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놓고 있었다.
프랑수와의 눈에 독일 종교개혁을 허용하는 것은 정치에도 꽤나 유익이 되는 것으로 비쳐졌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독일 제후들이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 칼5세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아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프랑수와의 일생은 전부 칼5세와 빚은 갈등으로 얼룩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수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서 칼5세와 경합을 벌였는데, 그만 정치 자금이 부족해서 패하고 말았다. 이후 프랑수와는 칼5세를 필두로 하여 합스부르크 영향 아래 있는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에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며 시달려야 했다. 영국과 협력을 추진했으나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고, 자구책으로 이슬람의 쉴레이만 대제와 동맹을 맺어 사방에서 비난받을 일을 자행하였다. 프랑수와는 밀라노 아래 위치한 파비아를 포위하여 승기를 잡았다가 칼5세의 군대에 다시 포위되는 바람에 패전하여 포로의 몸으로 마드리드에 감금되는 비운을 맛보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개혁에 우호적이던 프랑수와의 마음이 급격하게 굳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름 아니라 1534년 10월 17일에 일어난 “벽보 사건”이다. 파리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주요 도시에 미사, 마리아와 성인 숭배, 교황 제도 등 가톨릭을 전반적으로 공격하는 벽보가 공개적으로 나붙었다. 이 벽보는 심지어 국왕의 침실 문까지 부착되었다. 프랑수와는 벽보가 왕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을 바탕으로 서 있는데, 가톨릭을 공격하는 것은 왕국을 공격하는 것이며, 가톨릭이 무너지면 왕국도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벽보 사건으로 프랑수와는 누이 마르그리뜨와 달리 신교를 적대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이제 신교는 프랑수와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마르그리뜨가 인문주의자와 종교개혁자를 최대한 보호하고 후원하는 동안, 프랑수와는 신교를 박해하는 길로 분명하게 들어섰다. 이런 상황에서 후일 위그노의 정신을 이끌어갈 젊은 쟝 깔방도 파리를 등지고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프랑수와 통치 아래, 깔방과 동갑내기 어떤 유명한 인문주의자는 가톨릭을 비판한다는 죄목 아래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 파리 시내 광장에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을 당한 후에 불살라졌다(1546년). 프랑수와는 이제 막 종교개혁, 그 가운데서도 개혁파에 합류하여 서서히 역사의 무대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왈도파를 뤼베롱(메링돌)에서 대대적으로 무참하게 짓밟은 학살을 자행하였다(1545년).
프랑수와1세의 아들 앙리2세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계승 받았을 뿐 아니라 박해의 기질도 물려받았다. 결국 위그노 박해는 앙리2세에 의해 더욱 격렬하게 가속화되었다. 위그노는 끝내 역사에 머물면서 존중하려 했지만, 역사는 위그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역사 속에 내동댕이쳐진 위그노는 박해의 질곡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